“신은 죽었다” -니체. “너는 죽었다” -화장실 청소 아줌마. 며칠 후 화장실에 다시 이런 낙서가 달렸다. “니체를 죽인 사람은 화장실 아줌마로 밝혀졌다.” 이어지는 글귀. “벽에 낙서하지 마시오.”
화장실 낙서 풍경이다. 단순한 말장난만이 아니다. 낙서에는 사랑 인생 정치 철학까지 온갖 사회 현상이 담긴다. 해학과 위트로 넘쳐난다. 인문학의 서사다. 이런 낙서가 2000년 전 로마의 폼페이 골목길 벽면에도 가득했다.
화산재를 벗겨낸 순간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아쿠티우스가 돈을 갚지 않는다.” “숙박업소 주인이 포도주에 물을 탔다.” 당대 사가들이 황제와 전쟁 이야기를 기록할 때 민초들은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세기가 흘렀다. 치기 어린 낙서는 민중의 생생한 숨소리와 삶을 증언하는 사료로 피어났다.
‘호모 스크립토르(Homo scriptor).’ 기록을 향한 인간 본능을 가리킨다. ‘호모 나라투스(Homo Narratus)’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다. 기록은 알타미라·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시작한다. 。토판 설형문자와 양피지로 번진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진중에서 양피지에 사색을 남긴다. ‘명상록’의 탄생이다. 스토아철학의 정수가 된다.
금속 인쇄술은 기록을 대량 복제하게 만든다. 번역된 성경이 유럽 전역으로 번진다. 사회 구조를 바꾼다. 한 소녀의 일기가 어떤 역사책보다 강력하게 전쟁 참상을 고발한다. 인권 의식을 일깨운다. ‘안네의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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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든 자서전이든 인간은 기록으로 찰나의 삶을 영원에 이었다. 호모 나라투스의 본능이 개인 일상을 역사로 바꾼다. 이야기가 인류 유산으로 남는다. 요즘 자서전 쓰기 열풍이 거세다. 이를 두고 언론인 조갑제는 말한다. “머지않아 회고록을 쓴 사람과 안 쓴 사람으로 나뉠지 모른다. 쓴 사람의 삶은 AI를 통해 불멸의 기록으로 남고, 안 쓴 사람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96세의 내 부친은 모친과 함께 요양원에 계신다.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농담에 정치 이야기까지 거침없던 분이 입을 닫으셨다. 식사도 죽에서 미음으로 바뀌었다. 한 컵 남짓한 양인데 절반은 혀로 밀어내신다. 대부분 시간을 눈 감고 계신다. 갓 태어나 잠에 빠져든 아이 같다. 석 주를 넘어서자 더럭 겁이 났다. 경험자들이 임종 말기 증상이라고 했다. “아버지, 저 길원이에요.” 몇 번을 흔들어 깨우고서야 입을 여셨다. “길원이 왔냐.” “네, 아버지. 저 왔어요.” “고생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또 한 마디 하신다. “고생 많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비망록을 뒤졌다. 곱게 써 두신 유언장이 있었다. 금전출납 장부도, 기도문과 끄적거린 낙서도 있었다.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 생애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나는 아픔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나는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 사랑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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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난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참회문에 이르러 꺼억꺼억 울었다. 추억의 사진을 골랐다. 두 분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 컷 인생’이라더니 두 분의 삶이 그랬다. 사진 중심의 포토북이 16페이지로 정리되었다. 눈에 띈 구절이 하나 있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이 나의 유산이다.” 땅이라도 남기시지 하고 픽 웃었지만 이내 눈물을 찍어 눌렀다. 편집된 두 분의 미니 자서전을 들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우셨다. 인쇄물을 받아 든 누이가 전화 너머로 울먹였다.
소설가 김규나는 말한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길 중 하나가 자서전을 쓰는 일이라고. 소박했든 치열했든 한평생을 살며 깨우친 지혜를 자손과 지인에게 글로 남기는 행위는 너무도 소중하다. 불멸의 사랑으로 온 가족을 엮어 준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이 유산이라더니, 아버지 비망록과 삶의 일기가 유산 중 유산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네 컷 인생학교’였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인들이 환호했다. 자신도 입학생으로 불러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나를 지우고 잊으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플라톤은 스승의 사유와 아테네 법정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대화록’에 담았다. 그 기록이 서양 철학의 출발.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기록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야기로 기억된다. 남긴 이야기가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우리 모두는 ‘호모 나라투스’다.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어 깨우고서야 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