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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는 뛰어오르기 전 어떤 상상을 할까. 그저 머리 위 비어 있는 공간으로 뒷다리 힘이 허락하는 만큼 튀어 오르는 것일까.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전 상체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두 앞다리를 뻗어 자신이 내려앉을 높이를 가늠한다. 그러니까 그 지。에 가 닿을 자기 몸을, 그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이 먼저고 도약은 그다음이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배트로 공을 멀리 보내려면 먼저 공의 중심을 정확히 맞히는 자신의 움직임을 상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상상한 궤적을 따라 반복해 몸을 움직이고, 그런 다음에야 찰나의 순간에 공의 중심을 맞히는 어려운 동작을 해낼 수 있다. 공을 맞히기 전에 그 공이 닿을 지。에 먼저 마음을 보내야 한다.
상상력이란 이처럼 도약할 지。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먼저 보내는 일이다. 도달하게 될 지.을, 그 공간과 시간을 생생하게 그려 내는 힘이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로봇도 외계인도 없는 SF
그래서 나는 21세기의 사람들을 25세기, 30세기로 보내고 차원을 열 개로 늘린다고 해서 그것이 뛰어난 상상력이라고 보지 않는다. 소위 요즈음 SF들을 읽을 때 그런 인상을 자주 받곤 한다. 자기가 통과하고 있는 시대에 대한 예리한 인식도 없이, 기발함만을 상상력의 증거로 내세운다. 그건 우리가 도달하게 될 지。을 그려 내는 일이 아니라, 그저 가닿을 수 없는 지.으로 관객과 독자의 시선을 돌려 손쉽게 창의성의 지위를 획득하려는 나태함이다.
진짜 상상력은 도달할 지.을 정확히 그려 내는 것이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어떤 것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갈 것인지, 또 거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해 내는 것이다.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에는 로봇도 외계인도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가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블레이드 러너>와 나란히 놓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앞의 두 편에는 맞서는 대상이 뚜렷하다. 인공지능, 그리고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몸을 얻은 복제인간.
반면 <브라질>에서 주인공이 맞서는 대상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 상대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영화 속 모든 공간을 연결하는 배관들과 그 배관의 끝에 달린 스크린들이다. 저녁 아홉 시에 이유를 알 수 없이 맑은 하늘을 보여주다 돌연 등장하는 첫 장면 또한 수백 가지 색상의 덕트를 광고하는 남자를 비추던 스크린들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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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
<브라질>의 배관에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끝낼 수도 있는 서류가, 그 행정 명령이 지나간다. 냉난방, 급배수, 통신과 행정이 하나의 연결망 안에서 뒤엉켜 있다. 주인공 샘 라우리(조너선 프라이스)의 아파트에서 벽 패널이 뜯겨 나가는 순간, 그 뒤에선 기름투성이 관과 전선이 창자처럼 쏟아져 나온다. 마치 애써 덮어 두고 외면하던 사회의 내장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같다.
테리 길리엄이 이 영화를 통해 그리는 것은 초연결 사회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연결하는 그 관에 딱 맞는 표준화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샘의 어머니는 성형으로 나이를 지우려 하고, 식당에서 번호로 주문한 음식은 실물 사진과 함께 나오는 인공식이며, 연말이면 모두가 똑같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회색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의 옷도 동작도 구별되지 않는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이 영화가 조지 오웰의 『1984』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가제 또한 <1984½>였다. 오웰과 펠리니의 제목을 합쳤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는 거대한 스크린도, 어디에서나 감시하는 눈도 없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작은 화면과 그 앞에 놓인 확대경이다.
기록부의 직원들은 손바닥만 한 화면을 커다란 사각형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 직원들은 몰래 영화를 보기 위해 그 확대경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샘의 꿈속 여인인 질 또한 첫 등장 씬에서 여러 개의 거울과 욕조에 부착된 백미러를 이용해 스크린에 완전히 빠져 있다. 샘이 상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순간, 그의 얼굴만 그 반대편에서 잡힌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 커다랗게 확대된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카메라의 화각은 넓어지고, 공간은 좁아진다. 샘이 정보 검색부로 승진하고 배정받은 사무실은 한 사무실을 반으로 쪼갠 것이다. 옆방 남자가 책상을 당기자 샘의 책상은 벽 속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 샘을 내려다보고, 샘은 .차 사회가 만든 표준화라는 감옥 속에 갇힌 사람으로 보인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반면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무허가 기술자 해리 터틀만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만이 엘리베이터인지 지하철인지 알 수 없는 유리블록 상자 대신 로프를 타고 그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빌딩 숲 사이를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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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을 벗어난 그는 테러리스트다. 그 테러리스트를 잡으려다가 벌레 한 마리가 인쇄기에 떨어져 터틀(Tuttle)이 버틀(Buttle)이 되고, 엉뚱한 남자가 천장을 뚫고 내려온 이들에게 끌려가는 것이 이 영화의 발단이다. 남겨진 아내는 남편을 데려갔다는 사실에 대한 영수증에 서명해야 한다.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작 제대로 해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누구도 이 실수를 책임지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이 묵시록적 무거움이 아니라 풍자극의 가벼움으로 흘러간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어두운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
이 영화는 아주 구체적인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길리엄은 웨일스의 철강 도시 포트탤벗의 새까맣게 덮인 해변에서 이 영화를 만들기 전 이미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해 질 녘, 라디오를 만지작거리는 한 남자, 그리고 그가 발 딛고 선 세계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낭만적인 라틴 음악. 그 장면은 끝내 영화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영화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길리엄은 이 일화를 언급하며 "추함 속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샘 라우리의 꿈 또한 어두운 현실의 반대편에 있다. 그는 날개를 달고 구름 사이를 난다. 은빛 갑옷을 입고 커다란 검을 들고, 꿈의 여인을 구하기 위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서 분투한다. 그곳에서 그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자기 자신임이 드러나는 로봇 사무라이와 싸운다. 이 이미지가 반복되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샘의 꿈은 그 구성이 완전히 바뀐다. 그는 어머니 친구의 장례식에 갔다가 관 속으로 빠지는데, 여기에서부터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연결되며 때로는 벽 속에 숨겨진 문을 열고, 또 다른 구멍으로 빠지며 여러 공간을 자유롭게 오간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하지만 샘의 꿈은 가능한 지.으로의 도약이 아닌 도피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고문 의자에 묶인 채 그의 꿈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노래, '그 옛날의 브라질로 돌아가겠어요'라고 말하는 그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그를 내려다보던 헬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에게서 빠져나갔군, 잭."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와 같은 인물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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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디를 가도 똑같아 보이는 공간, 실수로 사람을 잡아들이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 안에서 승진을 원하지 않다가 꿈속의 여인을 찾기 위해서야 뒤늦게 승진을 받아들이는-영웅이라기보다는 그저 엉망진창인 샘 라우리에게서라면, 나는 어렵지 않게 나를 발견한다. 또 그런 상상력의 세계에서라면 거기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파생된다.
영화 <브라질> 촬영 현장 /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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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 배급사는 이 결말을 잘라 내고 샘의 탈출을 진짜로 만들어 버린 94분짜리 판본을 따로 만들었다. 제목은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Love Conquers All)>였다. 관객이 통과할 수 있는 규격에 맞춰 필름을 잘라 낸 셈이다. 마치 사회에 맞는 표준화된 인간이 되기 위해 관의 지름만큼 몸을 잘라내듯, 이 영화도 한동안 그렇게 잘린 채로 관객을 만났다.
이제 영화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길리엄이 그렸던, 화려한 외피 속에 오물이 흐르는 배관을 덮어 둔 세계를 살아간다.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알림에 시달리고,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같은 것을 본다.
이제는 말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까지 나왔다. 상상력으로 우리의 의식을 더 멀리 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지.은 언제나 똑같다. 마치 하나의 관을 통과하기 위해 그 관의 지름에 몸을 맞춘 듯 장르적 상상력 또한 표준화되어 간다. 이야기가 25세기로 가고, 차원이 열 개로 늘어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는 순간 드러나고 마는-우리 사회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감추기 위해, 그저 먼 곳으로 이야기를 보내 버린다.
영화 <브라질> 스틸컷 / 출처. IMDb
상상력은 SF 영화를 만드는 데에만 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을 만들고, 도시를 만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든다. 이론물리학이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넓은 우주를 의식으로 누비며 하나의 이야기를 써나가듯, 장르적 상상력은 두 개의 우주를 탐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우주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우주다.
<브라질>이 40년이 지나서도 다시 읽어 낼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두 개의 우주를 탐구하며 세상이 도달할 어두운 지。을 상상해 냈기 때문이다. 성공 공식만을 따르는 창작자는 이런 것을 해낼 수 없다.
도약보다 상상이 먼저다. 개구리도 뛰기 전에 분명 상상할 것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바로 그 지.으로 마음을 먼저 보내고, 거기에 도달한 자기 몸을, 그 공간과 시간을 상상해 내고, 그다음에 뒷다리에 힘을 줄 것이다.
영화 <브라질> 포스터 / 출처. IMDb
박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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