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한 교환 매개체인 화폐는 통화량 증가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목 가치가 하락하는 특성을 갖는다. 부동산·주식 등의 재화는 시장에서 가격이 조정된다. 임금근로와 공무원 보수 등은 정기적인 조정과 노사 협상을 통해 화폐가치의 하락을 보정하는 기제를 갖고 있다.
반면 보수·벌금·위자료·대학등록금 등은 화폐 가치 하락분을 조정하는 기제가 없거나 부족하다. 협상력이나 정치적 관심도가 낮은 영역의 가치는 상당 기간 명목금액이 고정되면서, 실질적인 가치가 하향된다.
2008년 3,770원이던 최저임금이 2026년 1만320원으로 2.7배가 되는 동안, 국선변호인이나 국선전담변호사의 보수, 위자료 기준액, 상해죄 등 여러 범죄의 벌금형 액수 등은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 그 예다.
위 문제의식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지난 회에서 사람이 수행하는 '일'의 규범적 가치를 산정하고 표시하는 단위인 '동가(動價)'와 이를 매개로 한 '동가표시제'라는 발상을 제안했다. 동가는 '사건당 월 최저임금의 75.00%(7,500동가)의 보수'처럼 규범적 기준을 척도로 하여 가치의 크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동가표시제는 화폐가치 하락이 낳는 왜곡과 영역 간 불균형을 보정하고, 다양한 가치의 크기를 적정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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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이 공유하는 규범의 원리는 선험적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반적·추상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
예컨대 2026년 한국의 법률가가 냉동수면에 들었다가 1000년 후에 깨어나도, 1000년 전 한국법의 법리, 배경 철학, 작동원리 등을 설명하며 1000년 뒤의 법률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가들은 여러 국가에서 서로 다른 연도에 그때마다 화폐의 수량으로 임의로 정해진 다양한 가치의 크기를 비교하는 영역에서는 규범적인 체계를 찾기 어려워한다. 법률가들은 행위의 위법성과 적법성은 고도의 규범 철학으로 다루면서도, 벌금액이나 위자료액 등 가치의 크기의 적정성을 규범적으로 이해하는 철학적 틀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동가는 여러 가치가 사람의 일(최저임금 등)에 견주어 어느정도 크기인지를 특정한 시대나 국가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표현한다. '사망 위자료는 월 최저임금의 15,000.00%(1,500,000동가)', '상해죄 벌금의 상한은 1,500.00%(150,000동가)', '국선변호 보수는 사건당 75.00%(7,500동가)'와 같은 동가의 표현방식은, 어느 시대와 장소에서나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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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치는 끊임없이 변하며 국가마다 다르므로, 여기에서 질서나 기준을 찾으려는 시도는 곧 무의미한 것이 된다. 하지만 동가는 젊을 때부터 노년까지, 나아가 과거의 기록에 남은 동가까지 같은 기준.을 가진다. 동가를 가치 척도로 활용하는 법률가는 고정된 기준。 위에서 가치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관.을 일관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동가를 물가나 국내총생산 등 시장에서 벌어진 가격 현상을 그대로 기록한 '경험적 사실'과 연동시키는 것도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보수·위자료·벌금·대학등록금 등은 시장에서 관찰된 가격이 아니라, 규범적 판단을 중심으로 하여 정해진다. 동가가 규범적 가치척도라는 。을 고려하면, 매년 심의를 거쳐 화폐가치의 하락과 적정 노동가치의 상향을 함께 반영해 결정되는 최저임금과 같은 '규범적 지표'와 연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의 설명은 동가를 산정하는 방식의 하나이며, 구체적 방식은 다양한 방향으로 검토될 수 있다. 동가표시제는 화폐를 대체하는 발상이 아니라, 화폐의 한계를 보완하는 규범이다. 동가로 표시된 가치는 별도의 조치 없이도 실질적 크기가 유지되고, 이를 낮추려면 동가를 하향하는 명시적 결정을 거쳐야 한다. 법률가가 위법과 적법을 규범의 언어로 논하듯, 동가는 가치의 크기를 규범의 언어로 논할 수 있게 하는 법률가들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김기원 변호사(법무법인 LKB평산)·서울지방변호사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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