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도쿄 현대총유연구회 심포지엄 기조강연·강연 자료 표지. 윤재선 목사 제공
지난 7월, 도쿄에서 열린 현대총유연구회(現代?有?究?)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기조강연을 맡았다. 내가 옮긴 '토지는 누구의 것인가(이가라시 다카요시 지음)'의 한국어판 출간이 그 계기가 되었다. 토지와 지역공동체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두 나라가 함께 놓인 현실로 옮겨 갔다. 저출생과 인구감소,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은 이미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두 나라는 같은 숙제를 안고 있었다.
강연의 제목은 「한국과 일본의 공통 과제와 차이 - 지방소멸의 위기와 한국형 현대총유의 가능성」였다. 결론을 먼저 내놓았다. 한국은 일본이 걸어온 길을 훨씬 빠른 속도로 따라가고 있으나, 자치의 제도적 성숙에서는 아직 한 걸음 뒤에 서 있다는 것이다.
앞의 절반은 숫자로 말했다. 수도권은 국토 면적의 1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데 인구의 50.8퍼센트, 지역내총생산의 52.8퍼센트, 20~30대 청년의 54퍼센트가 그곳에 몰려 있다. 인구의 30퍼센트가 수도권에 사는 일본을 훌쩍 넘어선 수치다.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같은 해 일본의 1.20명에 견주어 절반을 겨우 넘는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130곳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고, 제2의 도시 부산이 광역시로는 처음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마스다 히로야 선생이 『지방소멸』에서 던진 경고를 한국은 이미 현실로 마주하고 있다.
뒤의 절반은 제도의 이야기였다. 일본이 전후 반세기 넘게 자치를 이어 온 것과 달리, 한국의 지방자치는 1961년에 중단되었다가 1991년 지방의회로, 1995년 민선 단체장으로 되살아났다. 올해로 민선 자치 30년이다. 그러나 2023년 기준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은 74 대 26에 머물러 있고, 2024년 전국 평균 재정자립도는 48.6퍼센트로 절반에 못 미친다. 돈은 중앙이 쥐고 일은 지방이 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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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일본이 2000년 분권개혁으로 전면 폐지한 기관위임사무가 한국에는 2019년까지도 966건이 남아 있었다. 그 사무에는 지방의회의 조례 제정권이 미치지 못한다. 자치입법권의 사각지대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이가라시 선생이 책에서 2000년 이전 일본의 자치단체를 국가의 종속 기관이라 쓰신 대목을, 나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여러 번 되읽었다.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다.
강연에서 한국의 지방소멸 대응 법제를 소개하는 장면. 윤재선 목사 제공
그럼에도 한국은 나름의 실험을 이어 왔다. 제주와 세종, 그리고 2023년 출범한 강원과 이듬해의 전북이 특별자치의 이름으로 규제 특례와 넓은 자치권을 시도하고 있다. 다만 솔직한 평가도 함께 전했다. 특별자치가 늘어날수록 특별이라는 말의 무게가 옅어지고, 이름은 바뀌었으나 실질 권한은 더디게 따라온다는 비판이 있다. 일본 학자들이 가장 오래 물어 온 대목이었다.
강연의 마지막은 현대총유였다. 토지와 마을을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맡아 돌보는 것으로 바라보자는 이가라시 선생의 통찰은, 실은 우리 안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함께 농사짓던 두레, 마을의 자율 규범이던 향약, 서로 돕던 계가 그것이다. 다만 이 전통은 식민지기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며 상당 부분 사적 소유로 편입되어 오늘날 법의 보호가 약하다. 그 정신은 그러나 끊기지 않았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 이후 협동조합은 2만 개를 넘어섰고, 서울 성미산마을과 충남 홍동마을, 전북 완주의 사회적경제 네트워크가 한국형 현대총유의 싹으로 자라고 있다. 세 곳 모두 법이 먼저 만든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만들고 제도가 뒤늦게 따라온 자리였다.
도쿄에서의 논의는 오사카로 이어졌다. 신칸센을 타고 내가 객원교수로 있는 오사카공립대학교 도시과학·방재연구센터를 찾아 연구소장과 법학부 교수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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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줄어드는 도시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비어 가는 땅과 집을 누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답이 법령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골목과 마을에 있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오사카공립대학교 도시과학·방재연구센터에서 연구소장 및 법학부 교수진과 함께. 윤재선 목사 제공
여정은 후쿠오카로 이어졌다. 하카타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규슈대학 직원으로부터 구마모토 지역에 큰 지진이 났다는 다급한 소식을 들었다. 두 나라의 공동과제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에 재난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가 그 순간 끼어들었다.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는 배로 몇 시간이면 닿는 거리다. 우리 역시 지진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람들은 가족의 안부를 확인했고 열차 안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무엇보다 먼저 피해가 더 커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다행히 다음 날의 일정은 차질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한일 두 나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비교하며 오래 공부했던 규슈대학 법학부에서, 옛 스승과 연구자들을 다시 만났다. 공동의 지혜와 협력이 왜 지금 필요한지를 함께 확인한 자리였다.
규슈대학 법학부와 신캠퍼스에서. 오래 공부하던 자리로 다시 돌아온 걸음이었다. 윤재선 목사 제공
도쿄에서 오사카로, 다시 후쿠오카로 일본 열도를 종주한 이번 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거듭 깨달았다. 인구감소도 국경을 넘고, 지방소멸도 국경을 넘으며, 자연재해 역시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의 생존이 걸린 물음 앞에서는 어느 나라도 홀로 설 수 없다. 공동의 과제를 공동의 지혜로 풀어 가는 것이 순리다.
이번 걸음이 한 번의 강연으로 끝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도쿄의 심포지엄장에서, 오사카의 연구실에서, 후쿠오카의 강의동 앞에서 나는 같은 물음을 세 번 꺼냈다. 기관과 기관이 마주 앉은 공식 협의는 아니었다. 오랜 인연으로 이어져 온 이들에게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건넨 물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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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세 곳에서 만난 이들의 답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어려움을 지나고 있으니 함께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열흘 동안 열도를 남쪽으로 내려온 그 선이, 돌아보니 하나의 약속처럼 남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한일 정상 간의 대화에서도 확인되었다. 양국은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이라는 공동의 과제 앞에서 협력을 넓혀 가기로 뜻을 모았다. 외교와 안보를 넘어 국민의 삶과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문이 열린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뜻을 두 나라의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언어로 옮기는 일이다. 번역서 한 권으로 끝날 일이 아니기에, 큰 틀에서 네 가지를 제안한다. 정부와 연구자, 특히 지방자치단체장과 일선 공무원들이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다.
첫째, 빈집과 유휴토지의 실태를 조사하고 서로 견주어 기초자료를 마련하는 일이다.
일본은 오랜 기간 주택·토지 통계조사를 통해 빈집을 유형별로 파악해 왔고, 소유자를 알 수 없는 토지 문제에도 법제로 대응해 왔다. 한국의 지방자치단체가 그 데이터의 설계와 제도의 시행착오를 곁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면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통계의 항목을 맞추는 일은 작아 보이지만 모든 정책이 여기서 출발한다.
둘째, 현대총유(現代?有)의 발상을 지역 단위에서 실험해 보는 일이다.
소유는 개인에게 두더라도 이용과 관리는 지역이 함께 맡는 방식이다. 상속을 거듭하며 권리관계가 얽혀 손댈 수 없게 된 빈집과 빈터를, 마을이 일정 기간 위탁받아 활용하는 길을 열자는 것이다. 조례와 마을관리조합의 형태로 몇몇 시군에서 먼저 시도해 볼 만하다.
우리에게 낯선 발상은 아니다. 헌법 제122조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법률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둘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89년에는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라는 이른바 토지공개념 3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앞의 두 법은 1990년대에 위헌과 헌법불합치 판단을 받아 사라졌고 개발이익환수제만 남았다. 소유 자체를 제한하는 길이 헌법의 벽 앞에서 멈춰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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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총유는 그 벽을 정면으로 밀지 않는다. 소유는 그대로 두고 이용과 관리의 문을 여는 방식이어서, 우리 제도가 오래 막혀 있던 자리에 새로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토지의 공공성은 구호가 아니라 제도의 설계에서 드러난다.
셋째, 자매도시 교류를 형식에서 내실로 바꾸는 일이다.
의례적인 방문과 문화행사에 머물러 온 결연을 공동과제 해결형으로 전환하자. 빈집 재생, 청년 정착, 고령자 돌봄 가운데 하나를 정해 양쪽의 공무원과 연구자가 몇 해에 걸쳐 같은 문제를 함께 붙드는 것이다. 한 해에 한 번 사진을 찍고 헤어지는 교류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넷째, 재난 앞의 상호지원을 미리 약속해 두는 일이다.
구마모토의 지진이 보여 주듯 재해는 예고 없이 온다. 인접한 지방정부끼리 인력과 물자, 정보의 지원 절차를 평시에 문서로 정해 두는 것만으로도 초기 대응의 속도는 달라진다. 생명을 지키는 일 앞에서는 국경보다 협력이 앞선다. 나아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두 나라 시민이 먼저 구호의 손을 내밀 수 있도록, 이 약속 위에 신뢰를 차곡차곡 쌓아 갔으면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과제 - 평화헌법
이번 여정에는 앞의 네 가지와 결이 다른,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의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도, 연구실의 긴 대화에서도 이 물음은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내가 만난 일본의 지성인들은 헌법 9조를 지키는 일이 동북아의 평화공존에 기여한다는 데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 목소리가 공론의 자리에서는 좀처럼 크게 울리지 못할 뿐이었다. 호헌에 대한 조용한 공감이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 이번 방문의 가장 뜻밖의 소득이었다.
개헌 여부는 일본 국민의 주권적 선택이다. 다만 헌법 9조는 일본 한 나라의 조문에 머물지 않았다. 전후 동아시아의 질서가 그 조문 위에서 세워졌고, 전쟁의 피해를 입은 이웃들은 그것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약속으로 읽어 왔다. 그러므로 그 선택의 결과는 일본의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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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안전, 그리고 군비경쟁의 향방과 곧바로 이어진다. 이웃 나라 시민의 목소리가 남의 집안일에 대한 간섭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갈 미래에 대한 평화의 목소리다. 말할 자리를 스스로 닫아 버리는 침묵은, 이웃으로서의 책임을 조용히 내려놓는 일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두 나라 시민사회가 손을 맞잡을 때다. 정부와 정부의 협상만으로는 닿지 않는 곳에 시민과 시민의 연대가 닿는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세계유산으로 나란히 등재하자는 제안도 그 연대의 하나다. 남과 북과 일본이 한자리에 이름을 올린다면, 그 자체가 이미 동북아 평화공존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전쟁을 포기한 문장인 평화헌법과 전쟁이 멈춘 땅인 비무장지대는,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유산이자 우리 세대에 맡겨진 숙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일 관계는 과거의 역사와 정치적 갈등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역사를 성찰하는 일은 미래를 위한 출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의 기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앞으로의 한일 관계는 다음 세대를 위한 공동의 과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 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 비로소 한 걸음 성숙해질 것이다.
도쿄에서 시작된 성찰은 귀국길에서 하나의 시대적 질문으로 이어졌다. 공동의 과제는 학술회의의 토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있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초고령사회, 기후위기와 자연재해, 그리고 평화의 문제는 이제 두 나라가 나란히 마주 선 우리 시대의 과제로 자리 잡았다.
평화는 과거를 잊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서로의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공동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려는 신뢰와 책임 속에서 비로소 자라난다. 이제 한일 양국은 과거를 성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공동의 과제를 함께 해결하는 미래의 동반자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 줄 가장 소중한 유산이며, 동북아 평화공존을 향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적인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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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선 산천무지개교회 담임목사
진실은 노컷, 거짓은 칼컷
발상은 아니다.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