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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압박에 굴복해 파병한 일본 침략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고려 충혜왕 때인 1341년, 이곡(李穀)은 친구의 처외조모인 조씨 부인의 기구한 인생사를 전해 들었다. 일곱 살 때 군인이던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삼별초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열일곱 살 때 시아버지가 고려-몽골 연합군에 징발되어 일본 원정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군인이던 남편마저 고려를 침략해온 카단(哈丹)의 몽골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 뒤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외동딸을 키웠지만 그 딸도 젊어서 세상을 떠났고, 딸이 남긴 손자와 손녀를 돌보면서 일흔일곱 살이 되도록 살아왔노라는 이야기였다. 남편과 사별한 뒤 집안에 성인 남자가 하나도 없고, 나이 들어서는 기댈 아들조차 없었으니 여자 혼자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지 짐작이 된다. 이곡은 이 이야기를 ‘절부(節婦) 조씨전’이라는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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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용 목숨 걸고 몽골에 정보 지켜
1차 징발 고려군 4만 1만으로 줄여
새로 즉위한 충렬왕, 적극 협상 나서
고려군에 대한 독자적 지휘권 확보
조선의 나선 정벌 등은 파병 불가피
이란 파병, 역사적 정당성도 살펴야
」
두루마리 형태로 된 그림인 ‘몽고습래회사’(부분). 1281년 몽골의 일본 침략 당시 일본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가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해 전투 장면을 그린 것이다. [중앙포토]
아버지·시아버지·남편 잃은 조씨
조씨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 것은 전쟁이었다. 그나마 삼별초 반란과 카단에 대한 방어전에서 아버지와 남편이 전사한 것은 나라를 위한 죽음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된 시아버지의 죽음은 납득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이 흉측한 계책 탓에 당시 고려는 몽골의 일본 침략에 동원되었고, 조씨의 시아버지 같은 희생자를 수도 없이 내고야 말았다. 그 시작은 조씨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몽골의 침략이었다. 고려는 28년 동안 힘든 전쟁을 치렀고, 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가까스로 성공했으나 몽골의 각종 요구와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군대와 물자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고려를 굴복시킨 몽골은 일본으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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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이래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서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이들은 단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일본 침략에는 당시 세계 최강 몽골 기병도 어쩔 수 없는, 바다를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는 사신을 보내 복속을 권유하는 전략을 썼고, 여기에 고려를 동원했다. 몽골 사신을 일본까지 호송하는 일을 고려에 떠맡긴 것이다. 고려는 난감했다.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데다 사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게다가 일본에는 침략자 몽골의 앞잡이로 비칠 상황이었다. 고려는 마지못해 하는 시늉을 했다. 일본을 향해 가는 도중 거제도에서 풍랑을 만나자 뱃길의 위험을 과장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치지도외(置之度外), 즉 없는 셈 치는 것이 일본을 대하는 상책이라며 몽골을 설득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몽골과 일본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계속 압박해서 끝내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일본이 몽골 사신을 규슈나 쓰시마에 머물게 한 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음으로써 몽골의 요구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상대에게 순순히 복속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힘들게 보낸 사신이 연거푸 빈손으로 돌아오자 몽골에서는 일본 원정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우선 고려에서 군대를 징발하려고 했는데, 이때부터 동원 규모를 둘러싼 밀고 당기기가 시작되었다. 고려는 군인 수를 감췄다. 그것이 드러나면 일본 침략에 동원할 병력을 몽골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몽골에서 고려 사정을 잘 아는 왕준(王?)이 나섰다. 고려 왕족인 그는 전쟁 중 인질로 보내져 30년 가까이 그곳에 살면서 이때쯤에는 몽골 편에 서 있었다. 왕준은 고려에 5만 명의 군사가 있다고 알렸고, 쿠빌라이 칸은 그 말을 믿고 4만 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때마침 몽골에 가 있던 재상 이장용(李藏用)이 그 말을 부인하면서 “왕준의 말이 옳으면 내 목을 베고, 내 말이 옳으면 왕준의 목을 베라”고 버텼다. 그 서슬에 왕준도 더 말을 못했고, 쿠빌라이 칸은 이장용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군인 수를 보고할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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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지난 30년 동안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구가 많이 줄었으며, 그럼에도 황제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힘껏 징발해서 1만 명을 확보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을 몽골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고려의 군사 동원은 당초 몽골이 요구한 4만 명에서 1만 명으로 감축되었다.
일본 후쿠오카의 겐코부루(元寇防壘) 유적. 일본이 1274년 몽골의 1차 침략 이후 재침에 대비해서 해안선을 따라 쌓은 20㎞ 길이 방어 시설이다. [사진 이익주]
전함 건조에 식량까지 제공
군인 수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몽골의 요구대로 진행되었다. 일본 원정에 필수적인 전함은 1000척 전량을 고려에서 건조하는 것으로, 심지어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의 식량과 말먹이까지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연합부대의 지휘 체계에서 고려 장수들이 배제된 것도 큰 문제였다. 지휘부는 몽골군 도원수 쿠둔과 우부원수 홍차구, 좌부원수 유복형으로 구성되었고, 김방경을 비롯한 고려 장수에게는 지휘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군인과 전함, 물자만 대고 철저히 이용당하는 구조였다. 전쟁 직전 국왕 원종이 사망했음에도 차질 없이 그대로 진행된 것도 당시 고려의 취약한 처지를 보여준다. 결국 1274년 10월 고려의 전투병 8000명과 뱃사람 등 비전투 인력 6700명, 몽골군과 한군(漢軍) 2만5000명, 총 3만9700명이 고려에서 만든 전함에 몸을 싣고 합포(지금 창원)를 출발해서 일본 원정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 원정군은 풍랑을 만나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11월 귀환했을 때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무려 34%인 1만3500명이었다(고려군의 피해가 따로 집계되지는 않았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곧 고려에도 알려졌고, 새로 즉위한 충렬왕은 전략을 수정했다. 전처럼 소극적으로 끌려다니기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하되 대가를 분명하게 요구하는 방향이었다. 남송 멸망이 임박했으므로 몽골이 일본 침략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렇다면 일본 원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도 전략 수정의 이유가 되었다. 충렬왕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 칸을 직접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일본 원정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첫 번째가 전쟁 준비 과정에서 홍차구를 배제하고 즉시 소환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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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 사람이었지만 몽골을 대표해서 고려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두 가지 모두 받아들이고 고려에 상주하고 있던 다루가치도 폐지했다. 일본 원정에 협력하는 대가로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고 국익을 챙긴 것이다.
창원의 몽고정(蒙古井). 2차 일본 원정에 실패한 뒤 합포(지금 창원)에 몽골 군대가 주둔하면서 식수 공급을 위해 만든 우물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16만 대군, 태풍으로 물러나
충렬왕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 설치되자 자원해서 행성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또 차출된 고려 장수들에게는 몽골 관직을 수여하도록 요구해서 연합군 안에서 몽골 장수들과 대등한 지위를 갖게 했다. 특히 총사령관 김방경이 몽골의 도원수 관직을 받게 함으로써 동원된 고려군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1281년 5월 고려의 전투병 9960명, 비전투병 1만7029명과 몽골·한군 4만 명이 합포를 출발해서 원정길에 올랐다. 이들은 현지에서 10만 명의 강남군(江南軍·남송 지역의 군대)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니, 도합 16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누가 이들의 패배를 예상이나 했으랴.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을 만나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에서 동원한 인원 중 7592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그중에 조씨 부인의 시아버지도 들어 있었다.
김방경 묘지석. 김방경은 두 차례 일본 원정에 고려군 최고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사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몽골의 압박에 대응해 갖은 노력으로 부담을 줄이고 대가를 챙겼지만, 그렇다고 고려가 입은 막대한 피해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강대국에 굴복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에 참여했다는 오.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 군대를 파병한 적이 있었다.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조선이 러시아와 싸울 이유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청의 압박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파병은 전쟁에서 패배한 뒤 폭력적인 승전국의 요구를 피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여지라도 있다. 지금 파병 문제가 논란이다.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묻고 싶다. 그 국익에는 눈앞에 보이는 실리보다 더 중요한, 먼 훗날 역사에 기록될 우리의 모습까지 포함되어 있는가.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첫 번째가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