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1660∼1661년 그린 ‘델프트의 풍경’ 배경이 된 델프트 시내 전경. 360여 년이 흘렀는데도 느낌이 비슷하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1660∼1661년 그린 ‘델프트의 풍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한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델프트역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낯선 소도시 역을 나서자마자 오래된 벽돌집 사이로 운하가 흐르고 아담한 다리마다 자전거와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운하가 흐르는 델프트 시내.
다음 날 숙소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갓 구운 크루아상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운하에 거울처럼 비쳤다. 백조가 천천히 물살을 가르고 젊은이들은 높다란 자전거를 쌩쌩 몰았다. 델프트의 첫인상은 건강한 자유와 평화였다.
● “돌봄은 주의를 기울이는 일”
델프트공대에서 열린 ECLAS 학회.
델프트에 간 것은 지난달 16~19일 델프트공대에서 열린 유럽조경학교협의회(ECLAS)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이 학회 주제는 ‘돌봄-행성적 조경’. 에릭 A. 더 용 암스테르담대 명예교수는 마찰과 분열이 커지는 시대일수록 인간이 자연을 멀리서 관찰하는 존재에 머물지 말고 살아 있는 세계에 더 깊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논지는 간결했다. “돌봄은 먼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라는 것.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고 토양과 물, 식물과 동물,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일부로 바라보는 태도였다.
델프트공대 도서관 옥상 잔디밭.
강연을 듣고나니 델프트공대가 새롭게 보였다. 이 학교 도서관은 멀리서 보면 초록빛 언덕 같다. 넓은 잔디밭 한쪽을 비스듬히 들어 올린 녹색 지붕 위에 학생들이 앉거나 눕고 도서관은 그 아래에 들어서 있다. 2020년부터는 ‘델프트공대 에코 캠퍼스’ 프로젝트도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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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이 식생과 생물다양성을 조사하고 이를 실제 캠퍼스 설계에 반영한다. 나무 몇 그루를 더 심는 데 그치지 않고 빗물을 품고 여름의 열기를 낮추며 식물과 곤충이 함께 살아가는 조건을 만든다.
학회가 열리는 동안 시내 숙소에서 델프트공대까지 20분 남짓 거리를 걸어 다녔다. 소박한 집마다 현관 앞에 정원을 만들고 창가에는 화분을 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 길목에 있는 로열 델프트 박물관에서는 흰 바탕에 푸른 문양이 그려진 델프트 도자기를 눈에 가득 담고 잘 가꿔진 정원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토요일에는 운하를 따라 앤티크 벼룩시장도 열렸다. 우아한 소도시의 초록빛 환경과 내가 마주친 사람들의 친절한 태도가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 페르메이르의 풍경을 찾아
지난달 델프트시 블라밍스트라트 40∼42번지. 페르메이르의 1658년 작품 ‘작은 거리’(위 사진)는 이곳을 배경으로 했다.
델프트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로 유명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가 태어나 평생을 산 도시다.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함께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실내에 스며드는 빛을 화폭에 담았다. 야외 풍경을 담은 그림은 ‘델프트의 풍경’과 ‘작은 거리’ 단 두 .이다. 동틀 무렵, 두 풍경화의 장소를 찾아 나섰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평했던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1660~1661)은 도시 남쪽의 콜크 너머로 시가지를 바라본 풍경이다. 17세기 성문과 성벽은 사라졌지만 잔잔한 물과 도시, 커다란 하늘은 여전히 세 개의 수평선처럼 포개져 있었다. 360여 년 전, 페르메이르도 이 빛을 오래 바라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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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1658년 작품 ‘작은 거리.
‘작은 거리’(1658)의 배경은 블라밍스트라트 40~42번지로 알려져 있다. 마침 내가 머문 숙소가 같은 거리에 있었다. 낡은 벽돌집과 골목,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시간을 세심하게 담은 그림 속 장소 앞에 서니 학회에서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돌봄은 주의 깊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시내 구교회에는 페르메이르가 잠들어 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그의 묘비 옆에는 그림 이미지들과 누군가 놓고 간 꽃다발이 있었다. 평생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던 화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도시의 땅속에 남았다.
● 시든 뒤에도 아름다운 정원
바세나르 포르린덴 미술관의 피트 아우돌프 정원.
델프트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바세나르의 미술관 포르린덴(Voorlinden)을 찾아갔다. 네덜란드가 낳은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82)가 이 미술관의 정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하이라인과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도 정원을 만든 그는 여러해살이풀과 그라스를 이용해 자연에 가까운 풍경을 만드는 ‘더치 웨이브’를 이끌어 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고풍스러운 주택가를 지나 포르린덴에 들어서자 고요한 숲길이 펼쳐졌다. 언젠가 프랑스 보르도 포도밭에서 봤던 벨기에 작가 얀 파브르의 청동 조각 ‘구름을 재는 남자’가 야외 정원에서 가장 먼저 반겼다. 사다리 위에 올라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헤아려보려는 인간의 모습….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미술관이 나왔다. 미술관을 둘러싼 정원에는 현대미술의 거장 알렉스 카츠(99)가 아내의 뒷모습을 묘사한 평면 강철 작품이 서 있었다. 그녀가 정원을 걷고 있는 듯했다.
9월의 아우돌프 정원은 한창 피어나는 봄의 정원과는 달랐다. 꽃은 조금씩 색을 잃어가고 잎은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키 큰 그라스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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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돌프는 봄의 성장과 여름의 개화, 가을의 쇠락과 겨울의 빈자리까지 식물의 생애 전체를 정원으로 본다. 아름다움은 가장 화려한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들고 노화하는 시간까지 지켜보는 것이 또 다른 돌봄이었다.
포르린덴은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지난달부터 내년 3월까지 ‘예술계의 아이콘들을 기리며’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론 뮤익, 리처드 세라 등 현대미술과 자연이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미술관 유리 통창 너머로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들을 볼 수 있어 왜 미술관 측이 이곳의 정원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예술 작품”이라고 설명하는지 알 것 같았다.
●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덴대 식물원.
델프트에서 기차로 30분이면 닿는 인근 소도시 라이덴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 렘브란트의 고향 라이덴에는 1590년 문을 연,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인 라이덴대 식물원이 있다.
의대생들에게 약용식물을 가르치기 위한 약초원에서 출발한 이곳은 식물학자 카롤루스 클루시우스가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식물원 모습을 갖췄다. 지금도 한쪽에는 당시의 식재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클루시우스 정원’이 있다.
식물원을 걷다가 ‘시스템 정원’ 린네 베드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스웨덴 식물학자 카를 폰 린네는 1735년 라이덴을 찾았고, 그의 저서 ‘자연의 체계’ 초판도 같은 해 라이덴에서 인쇄됐다. 식물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기록해 온 시간이 이 장소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식물원 구경만큼이나 식물원 레스토랑에서 샐러드를 먹은 것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수백 년 동안 식물을 연구해 온 곳에서 길러진 식물을 먹는 경험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델프트에서 라이덴까지 여러 정원을 걸으며 되풀이해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돌봄은 거창한 행위가 아닐 것이라고. 시들어가는 잎사귀와 오래된 골목, 매일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처럼 우리 곁의 존재들을 무심히 대하지 않는 일일 것이라고.
년 동안 식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