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우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 강남구 송은 1층 전시장 전경. 작가는 흰 천으로 겹겹이 쌓인 콜로세움의 형태를 표현하고, 돌과 동전, 금속으로 만든 오브제로 구조를 형상화했다. /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Photo: Jaebum Kim
새하얀 전시장 벽 곳곳에 뜻을 알 수 없는 낙서가 적혀 있다. 벽 한쪽에는 팝콘과 구겨진 영수증이 쌓여 작은 산을 이뤘다. 세계 각국의 동전을 길게 이어 붙인 오브제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늘어져 있다. 주얼리 브랜드 불가리와 송은문화재단이 공동 기획한 전시의 풍경이다.
서울 강남구 송은에서 전시 ‘라이트, 폼 앤드 비전(LIGHT, FORM AND VISION)’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작가 6명(팀)이 참여했다. 모두 송은문화재단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작가들로, 그레이코드와 지인, 김지수, 박준범, 이은우, 정영호, 최성임 등이다.
이번 전시의 출발。은 불가리의 대표 주얼리 컬렉션 ‘비제로원’이다. 1999년 첫선을 보인 비제로원은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서 영감을 얻어 불가리 특유의 디자인으로 재해석한 컬렉션이다. 참여 작가들은 비제로원의 모티브가 된 콜로세움을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 20여 .을 선보인다. 회화와 조각, 영상, 설치, 사운드 등 장르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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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부터 지상 2층까지 전시장 곳곳에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은우 작가는 콜로세움의 건축적 형태와 공간성에 주목했다. 층층이 쌓인 구조와 반복되는 아치에서 착안해 금속과 돌멩이, 동전 등을 활용한 ‘게이즈’ 연작을 제작했다. 흰 천을 겹겹이 쌓아 콜로세움의 중층 구조를 형상화한 작품도 선보인다. 기계음을 내며 미세하게 움직이는 이 작품은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의 견고함을 연약한 재료와 움직임으로 대비시킨다.
이탈리아 로마 골목을 촬영한 사진을 콜라주 방식으로 구성한 박준범 작가의 영상 작업.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Photo: Jaebum Kim
전시장 한쪽 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적혀 있다. ‘잔잔하게 죽고싶네’, ‘지나치게 평범해서 슬프고 낭만적인’, ‘사주를 봐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다!’ 등이다. 마치 누군가 일기장에 적어 놓은 푸념처럼 보이지만, 이 낙서들 역시 엄연한 작품이다. 다른 벽에 검은 글씨로 큼지막하게 적힌 화장실과 주차장 안내 문구도 작품이다.
이은우는 콜로세움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유희를 즐기던 오락의 공간이었다는 。에 주목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으레 낙서가 남기 마련이다. 영수증과 팝콘, 동전, 체스판을 닮은 놀이판, 작은 탑처럼 쌓아 올린 간식 역시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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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작가는 2025년 제작한 회화 ‘나의 시적 우주’와 2026년작 원목 모듈 설치 작품 ‘시공향’을 선보인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간에는 저마다 다른 향기도 뒤섞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모듈 작품 앞을 지나면 식물에서 비롯된 은은한 향이 풍긴다. 작가가 처음 불가리 향수를 맡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작업실이 있는 제주 자연에서 추출한 향을 활용했다.
빵 봉투를 묶는 끈으로 황금빛 이불을 만들어 일상을 완성하는 사소함에 주목한 최성임 작가 '황금 이불'과 진동과 떨림을 시각화한 작품 '시작'. /ⓒ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Photo: Jaebum Kim
일상적인 재료로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최성임 작가는 2층 전시장에 황금빛 이불을 펼쳐 놓았다. 빵 봉투를 묶는 작은 끈들을 하나하나 엮어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업은 거대한 콜로세움을 벽돌 한 장씩 쌓아 올린 노동자들의 손길을 떠올리게 한다. 사소한 재료를 반복해서 엮는 행위를 통해 화려한 건축물 이면에 쌓인 평범한 노동과 시간의 흔적을 환기한다.
이 밖에도 박준범은 이탈리아 로마의 거리 풍경을 촬영해 콜라주 방식으로 재구성한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정영호는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의 나선형 역사관을 작품에 반영했으며, 아티스트 듀오 그레이코드와 지인은 사운드 설치 작업을 공개한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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