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동대제국 황궁의 무도회장에서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후와 서왕국 왕자가 춤을 춘다. 서양 시대극의 한 장면 같지만 황후는 신민아가, 왕자는 이종석이 연기한다. 지난 3일 디즈니+에서 첫 4회가 공개된 드라마 ‘재혼 황후’ 이야기다.
디즈니+ 드라마 '재혼 황후'에서 황후 나비에 역의 신민아(왼쪽)와 서왕국 왕자 하인리 역의 이종석이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장면. 한국 배우들이 서양풍 황실 인물을 연기하는 이 작품은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사진 디즈니+
이름도 배경도 서양 그대로다. 한국 배우들이 서양식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고, 드레스와 제복 차림으로 가상의 황실을 누빈다. 예고편 공개 당시엔 “코스프레를 보는 느낌”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그런데 막상 공개되자 처음엔 어색했지만 회차가 갈수록 빠져들었다는 후기가 이어진다. 1~4회가 공개된 지 하루 만인 4일에는 디즈니+ ‘오늘 한국의 TOP 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글로벌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 기준으로는 한국·일본은 물론 벨기에·스위스 등 12개국의 디즈니+ TV쇼 부문 1위를 기록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이라도 세계관이 단단하면 설득된다는 얘기다.
그 바탕엔 ‘로맨스 판타지(로판)’의 대중화가 있다. 웹소설·웹툰 독자들끼리만 통하던 캐릭터와 설정이 작품 밖으로 나왔다. 차갑지만 한 사람에게만 다정한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는 ‘북부대공’이 대표적이다.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도 북부대공이 어떤 남자인지 안다. 기업들은 이런 캐릭터를 광고에 끌어들이고, 팝업스토어에선 방문객을 ‘레이디’라고 부르며 작품 속 세계로 초대한다. 마니아의 언어였던 로판이 콘텐트와 마케팅의 문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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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가 ‘소비에슈’를 연기하는 시대
‘재혼 황후’는 동대제국 황후 나비에(신민아)가 황제 소비에슈(주지훈)로부터 이혼을 통보받은 뒤, 서왕국 왕자 하인리(이종석)와 재혼을 택하는 이야기다. 원작은 동명의 인기 로판 웹소설·웹툰으로, 가상의 제국과 왕국을 배경으로 황실의 권력 다툼과 인물들의 로맨스를 그린다. 웹툰의 글로벌 누적 조회수는 약 30억 회에 이른다. 드라마는 독일 슐라이스하임 궁전에서 황궁 장면을 촬영하고, 하인리가 새로 변신하는 모습까지 구현하는 등 원작의 세계관을 실사로 옮겼다.
공개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서양풍 황실에서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과 대사 톤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면 배우들의 연기와 이야기 전개가 로판 특유의 재미를 살렸다는 호평도 이어졌다. 작품이 흥행해 로판 드라마가 더 많이 나오면 좋아하는 배우가 왕자를 연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반응도 눈에 띈다.
디즈니+ 드라마 ‘재혼 황후’에서 황제 소비에슈 역의 주지훈(왼쪽)과 황후 나비에 역의 신민아. 인물 이름부터 의상, 황실 배경까지 원작의 서양풍 세계관을 그대로 옮겼다. 사진 디즈니+
한국 배우가 서양풍 인물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처음은 아니다. 국내 뮤지컬 무대에서는 한국 배우가 오스트리아 황후와 프랑스 왕비를 연기하는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랫동안 공연됐다. 19세기 영국 상류 사교계의 연애와 결혼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도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서양풍 귀족 사회와 로맨스라는 소재 자체는 이미 한국 관객에게 낯설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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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재혼 황후’는 실제 역사가 아닌 가상의 황실을 배경으로 한다는 。에서 차이가 있다. 황제와 황후, 왕자의 관계부터 국가의 이름과 권력 구조까지 작품 안에서 만들어낸 설정이다. 현실과 얼마나 닮았느냐보다 그 세계관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해진다. 이런 설정을 받아들이게 하는 바탕에는 로판이라는 장르에 대한 익숙함이 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작품 밖, 일상의 언어에서 먼저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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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밖으로 나온 로판의 언어
요즘 가장 자주 들리는 로판 용어를 꼽으라면 단연 ‘북부대공’이다.
로맨스 판타지(로판) 웹소설·웹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북부대공'의 전형적인 모습을 AI로 구현했다. 북부대공은 춥고 척박한 북부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으로, 차가운 인상과 성격 뒤에 상처를 간직했지만 사랑하는 여성에게는 다정한 인물로 그려진다. AI 생성 이미지
“차가운 냉미남 같은 인상에 키 크고 덩치도 크고, 검은 퍼가 달린 옷을 입은 남자요. 과묵하고 냉소적이지만 알고 보면 어릴 적 남모를 상처가 있고 뒤에서 묵묵히 챙겨줄 것 같아요.” 직장인 A씨(28)는 북부대공에 대해 외모부터 성격, 과거의 사연까지 막힘없이 설명했다.
이 남자는 특정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다. 로판 웹소설·웹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만들어진 전형적인 캐릭터다. 춥고 척박한 북부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으로, 뛰어난 능력과 차가운 성격 뒤에 상처를 간직했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한 인물로 그려진다.
연예계에서는 북부대공이 작품 속 인물을 넘어 실제 인물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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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에이티즈의 최산은 검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로 ‘북부대공상’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배우 허남준도 서늘한 인상 덕에 같은 수식어로 불린다. 반대로 여유롭고 잘 웃는 다정한 남성을 가리키는 ‘남부대공’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A씨는 “팬들이 연예인을 칭찬하거나 2차 창작물을 만들 때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며 “오글거리기보다 가벼운 유머나 농담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배우 허남준(왼쪽)과 그룹 에이티즈의 최산은 서늘한 인상과 날카로운 눈매, 탄탄한 몸 등으로 ‘북부대공상’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로판 속 캐릭터를 가리키던 표현이 이제 실제 연예인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사진 에이치솔리드, 뉴스1
연예인에게 붙던 이 농담은 이제 주변 사람에게로 옮겨왔다. 대학생 B씨(24)는 “친구가 털 달린 검은 옷을 입고 오면 ‘너 오늘 북부대공 같다’고 놀린다”며 “친구들끼리 ‘소녀는 ~했사와요’ 같은 말투를 쓰면서 귀족 영애 말투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캐릭터뿐 아니라 로판 속 호칭과 말투까지 놀이의 소재가 된 셈이다.
검색 데이터에도 이런 변화가 드러난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북부대공’의 2025년 월평균 검색 관심도는 전년의 약 3.5배로 높아졌고, 올해 7월에는 분석 기간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제 검색 건수가 아닌 상대적 관심도지만 장르 속 캐릭터 유형이 독립적인 검색어로 주목받고 있다는 。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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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도 로판의 문법을 안다
기업들도 이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어패럴은 지난 9월 고윤정과 허남준이 함께 출연한 26FW 시즌 ‘코스토니’ 캠페인 영상을 공개했다. 제작사 돌고래유괴단이 자사 유튜브 채널에 올린 해당 영상 제목은 ‘한양공주 고윤정&북부대공 허남준’이다. 정작 영상 속 허남준은 차가운 대공이지만 고윤정에게 거절당하고 오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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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대공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비튼 반전이 웃음 포인트다. 영상은 공개 일주일 만에 주요 SNS 합산 조회수 2500만 회를 넘었다.
하이원리조트가 로판 세계관을 활용해 제작한 AI 숏드라마 ‘원추리 신부에게 길들여졌습니다’의 한 장면. 북부대공과 여주인공의 로맨스를 리조트 풍경과 결합한 마케팅 콘텐트로, 지난 7월부터 공개됐다. 사진 하이원리조트 공식 유튜브 영상 캡처
하이원리조트는 로판의 설정을 아예 광고의 이야기 구조로 가져왔다. 지난 7월부터 공개한 인공지능(AI) 숏드라마 ‘원추리 신부에게 길들여졌습니다’에는 북부대공과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리조트 풍경과 엮은 영상으로, 1~4편의 누적 조회수가 약 270만 회에 이른다. 로판 특유의 캐릭터와 서사를 마케팅 콘텐트로 활용한 사례다.
오프라인에서는 작품 속 세계관을 직접 경험하게 한다. 디즈니+는 지난 3일 서울 성수동에 ‘재혼 황후’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방문객을 ‘레이디’라고 부르고, 이름을 입력하면 로판 세계관에 어울리는 귀족 이름을 만들어준다. 왕좌와 침실, 드레스와 티아라 등 드라마 속 황실을 재현한 공간도 마련됐다. 서울 금천구 마리오아울렛에서는 원작 웹툰 속 의상과 공간을 재현한 체험형 전시도 열리고 있다.
광고는 잘 알려진 캐릭터를 빌려 눈길을 끌고, 숏드라마는 익숙한 로맨스 서사를 활용한다. 팝업은 관람객이 작품 속 인물이 된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소비자가 로판의 설정과 문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장르 안에서 통하던 표현과 세계관이 이제 기업 마케팅의 언어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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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몰라도 통하는 세계관
로판의 세계관이 대중화됐다는 것은 모두가 작품을 즐겨 본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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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몰라도 북부대공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황녀와 영애 같은 호칭을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작품을 직접 보지 않아도 장르의 언어와 설정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서울 성수동에서 열리고 있는 디즈니+ ‘재혼 황후’ 팝업스토어의 드레스와 티아라(위쪽). 방문객을 ‘레이디’라고 부르고 귀족 이름을 만들어주는 등 로판 세계관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아래쪽은 서울 금천구 마리오아울렛에서 열리는 원작 웹툰 전시로, 작품 속 장면과 캐릭터를 선보였다. 사진 디즈니+, 이지영 기자
장르 밖에서 이런 말이 통하게 된 데에는 SNS의 역할이 컸다. 팬덤 안에서 만들어진 표현이 유튜브와 숏폼을 타고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산했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누구나 콘텐트를 퍼뜨릴 수 있는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보니, 뭐 하나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번진다”며 “예전의 ‘츤데레’처럼 이런 표현을 따라 쓰면서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스스로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로판의 언어뿐 아니라 서양풍 세계관 자체도 대중에게 마냥 낯설지는 않다. 공 평론가는 ‘베르사유의 장미’나 ‘캔디’ 같은 만화를 보고 자란 중장년층을 예로 들며 “웹툰을 몰라도 어린 시절 즐긴 만화가 현실이 된 듯한 친근감이 있다”고 말했다. 북부대공 같은 캐릭터를 일상어로 쓰는 요즘 세대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 배우가 연기하는 황제 소비에슈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져도 결국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배경이다. 현실과 얼마나 닮았는지보다 세계관이 얼마나 단단한지가 중요해진, 요즘 콘텐트의 흐름이다.
■ b.이슈
「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
들며 “웹툰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