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이 격화하고 있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의 빈틈을 메우는 수준을 넘어 확인되지 않은 가설과 자의적 해석을 통해 왜곡된 역사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영화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의 단독 범행인 육 여사 피격 사건에 대해 박정희 전(前) 대통령 또는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어 관객들이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음모론을 사실처럼 만들었다” “역사 왜곡… 돈이 아깝다”는 평이 쏟아지며 역풍(逆風)마저 불고 있다. 지난 23일 개봉 이후 추석 연휴 기간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켰던 이 영화는 28일에는 관객 수가 줄어 ‘타짜: 벨제붑의 노래’에 이어 2위로 내려앉았다.
국민의힘 등 야권에선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될 수 없는 패륜”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9일에는 제작진에 대한 경찰 고발까지 접수됐다. 제작진은 “창작의 산물로 봐달라”고 했지만,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역사를 비트는 정도가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사회 일각의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이들 영화를 통해 확대 증폭되고 있다.
◇부인 잃은 피해자를 가해자인듯 몰아놓고… ‘영화적 상상력’ 운운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에 실제와 달리 숨겨진 배후가 있었다는 영화의 가설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는 시종 직·간접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또는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등 일부 시사·예능 TV 프로그램이 시선을 끌기 위해 제기했던 의혹을 엮어 극화한 것이다. 대중매체에 떠돌던 의혹과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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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역사에 대한 시각이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최소한 확인된 사실과 확인되지 않은 가설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이 작품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황당한 의혹 같은 것은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2002년 김정일이 방북한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게 육 여사 피격 사건에 사과했다는 일부 외신 보도가 있었다거나, 사건 현장에 있던 다른 목격자의 증언 같은 것은 배제한 채 자신들의 영화에 필요한 사건이나 진술만 선택적으로 짜깁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하이브미디어코프
◇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 앞세워 역사 비틀어
피해자의 유족과 당시에 비통해했던 국민들이 지금도 살아 있는 사건을 다루면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긴 역사적 비극을 왜곡하는 행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제작사의 사과와 영화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온라인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29일 현재 출연 배우들의 소셜미디어는 물론, 영화에 추천사를 남긴 배우와 영화를 소개한 유튜브 채널에도 비판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관객들은 근현대사를 편향된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영화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네이버 실관람객 리뷰에는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한심한 좌파 선동 영화” “이제 이런 정치적인 선동 영화에 놀아날 국민이 아니다” 등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영화를 본 뒤 실제 역사를 찾아보고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음모론인지 알아버렸다”고 쓴 관객도 있었다.
◇ “영화계의 고질적 ‘역사 왜곡 상업주의’... 책임 의식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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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현대사 왜곡 논란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 등 현대사 관련 영화가 꾸준히 흥행하면서,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논쟁적 소재를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으로 기획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황근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는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은 작은 팩트를 확대하고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지는 가짜 뉴스와 메커니즘이 같다”며 “이 영화는 제작진이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욕을 먹더라도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길을 선택한 것 아닌가 의심될 정도”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현대사를 콘텐츠화할 때는 사회에 미칠 영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건을 직접 겪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처음 접하는 젊은 세대가 허구적 설정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복룡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는 “사극은 ‘픽션으로 봐달라’는 말로 역사적 사실에서 현격하게 벗어난 묘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면서 “요즘 역사 콘텐츠들은 관객의 호기심을 끌려다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역사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스스로 ‘절반은 역사학자’라는 소명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순간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이 총격을 가한 직후의 모습.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권총을 든 채 연단을 호위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총탄을 맞고 쓰러진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본지 임희순 기자의 특종 사진. /조선일보 DB
‘5·18 민주화 운동’이나 ‘제주 4·3’,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모두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한 부분인데, 5·18이나 4·3에 대해선 다른 역사적 해석의 가능성을 일절 허용하지 않으면서, 이번처럼 박정희 정부 시절의 역사에 대해선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내로남불’도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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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관객은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영화 만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문화계가 너무 좌편향되어서 걱정”이라고 썼다. 인터넷에선 ‘암살자(들)’을 패러디한 ‘자살자(들)’ ‘영부인(들)’이나, ‘부엉이 바위의 진실’ ‘아수라: 공소취소’ 같은 ‘미러링(되갚음)’ 콘텐츠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배재고 학생들이 5·18 묘지 참배했듯이 ‘암살자(들)’ 감독·배우들은 박정희 대통령 묘지 앞에서 참배하고 사죄하라”고 했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만약 5·18이 북한 소행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면, 세월호 참사가 민주당 소행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면 정말 많은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 ‘건국전쟁’ 감독은 국감에 불러 놓고... ‘암살자(들)’은 안 된다는 여당
야당은 “(암살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우리 역사에 대한 공격”이라며 영화 상영 중단과 감독의 국정감사 출석 등을 요구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공격하는 이유는 건국의 역사를 삭제하고, 산업화의 여정에 먹칠하려는 것”이라며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우리 역사에 대한 공격”이라고 했다. 반면, 여당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켜선 안 된다”며 야권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예술 종사자들에 대한 권리 침해”라고 주장했다.
이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야당은 ‘암살자(들)’의 허진호 감독을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부르자고 했지만, 민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민주당 이정문 의원은 “허 감독을 부르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킨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은 “지난해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이 국감에 출석했을 때 민주당 의원들은 제주 4·3 등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작품이라면서 정면 반발했다”며 “1년 만에 기준이 달라진 것이냐”고 했다.
사건에 실제와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