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은 피해자의 고통이 명백한 범죄다. 사건 자체에서 오는 고통이 클 뿐 아니라 재판을 진행하면서 생기는 2차 피해도 크다.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느냐, 무죄가 되느냐에 따라 피해자의 일상 회복 가능성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최근 들어서는 적극적인 피해 회복을 원하는 피해자가 늘어나면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수사와 재판에 참여하려는 피해자도 늘고 있다.
때로는 피고인을, 때로는 피해자를 대리하는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들은 형사소송법상 피해자 지위에 대해 어떻게 볼까. 이들은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수사와 재판에 피해자가 참여하려 할 때 너무 많은 것들이 ‘복불복’으로 달라진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증거에 접근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진술하거나 의견을 낼 수 있는지, 그 의견이 반영되는지 등이 경찰과 검사, 판사 재량에 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해자가 형사절차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근본적 한계 때문이다.
[내 사건에, 내 자리를] 수사기관을 찾은 성폭력 피해자는 어떻게 배신당하는가
[내 사건에, 내 자리를] 반박조차 할 수 없는, 방청석의 피해자
변호사들이 본 피해자의 지위, ‘케이스 바이 케이스’
피해자를 대리해본 경험이 많은 변호사들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을 많이 썼다. 판사가 어떻게 판단하는지, 경찰이나 검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고 싶다면, 현행 제도에서는 공판검사에게 내야 한다. 검사가 이를 검토한 뒤 재판부에 증거신청을 해야 재판정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 검사가 이 사실관계를 제출하지 않겠다고 판단하면 이는 재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는 재판에서 공소사실 유무죄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거나 재판부에 증거를 제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형이나 피해 정도에 관한 의견서 정도만 낼 수 있다.
박수진 법무법인 혜석 변호사는 “공판검사가 받아주지 않으면 재판부에 참고자료로라도 증거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내용을 살펴보는 재판부도 있지만 불편해하며 아예 안 받아주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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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제출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재판부 재량에 따라 수용 여부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재판의 결론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가 피고인의 진술에서 허.을 찾았다 해도 검사를 통해 질문해야 한다. 공판검사가 받아주면 검증을 할 수 있고, 받아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피해자의 대리인인 변호사의 권리는 피해자의 권리를 넘지 못한다. 피해자 변호사들은 이런 이유로 피고인과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자의 변호사는 재판 일정을 통보받지 못한다. 구속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 일정을 잡거나 다음 공판기일을 잡을 때 피해자 변호인의 일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변호사가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지도 복불복이다. 정명화 법무법인 이채 변호사는 “법원에서 피의자의 구속 여부를 결정할 때 검토하는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지 가장 잘 아는 당사자는 피해자일 수 있는데 피해자 출석을 확인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며 “가끔 미리 영장실질심사 일정을 알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규정이 없다 보니 재량에 맡겨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로 변호사까지 선임해 재판에 대응한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피하지 못하기도 한다. 박수진 변호사는 과거 한 스토킹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던 중 다른 재판 일정 때문에 항소심 공판에 참여하지 못한 적이 있다. 단 한 번 참석하지 못한 그날, 재판부는 피해자의 업계 동료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박 변호사는 “해당 인물은 사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을뿐더러, 피해자는 그에게 구체적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불편해했다”며 “당일 법정에 출석했더라면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어떻게든 의견을 냈겠지만 출석하지 못해 의견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의견을 적극 내고 싶은 피해자들이 검사와 재판부 눈치를 보느라 위축되기도 한다. 김정혜 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피해자들은 법원에 탄원서를 너무 많이 내면 일종의 ‘악성민원인’이 될까봐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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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출신인 오지원 법률사무소 법과치유 변호사는 “피해자 관련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복불복이고 행운에 달려 있다. 이건 형평성 차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피해자 권리는 ‘피고인의 방어권’과 상충될까
형사사법절차에서의 피해자 권리가 아예 답보상태인 것은 아니다. 2006년 범죄피해자보호법이 제정됐고, 2007년에는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신뢰관계자와의 동석이나 피해자 통지제도, 피해자 기록열람등사제도 등을 신설했다. 2012년에는 피해자 국선변호사제도가 도입돼 성폭력, 아동학대, 장애인학대, 인신매매 등 범죄피해자들이 절차 초기부터 국선변호사의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최근 도입된 제도 중에서는 지난해 9월 시행된 피해자의 형사재판기록 열람등사권 확대가 가장 크고 실질적인 변화로 꼽힌다. 이전에는 판사가 허용하는 경우 기록을 열람할 수 있었으나 허용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피해자의 정보 접근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컸는데, 형사소송법과 형사소송규칙 개정으로 피해자의 소송기록 열람등사가 원칙적으로 허가됐다. 이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씨와 같은 피해자들이 사건을 공론화하고 피해자에게 권리를 달라고 싸운 끝에 이뤄낸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람등사 불허 이유를 알기 어렵다는 ., 불허에 불복할 수 있는 절차가 없다는 .은 여전히 한계다.
피해자의 형사재판기록 열람 등사권 확대
경찰 수사개혁위원회가 지난달 31일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의 참여 및 권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수사개혁위는 불송치나 불기소 등 수사사건의 주요 처분과 그 이유에 관한 설명, 주요 처분에 대한 이의제기, 수사·재판 기록 접근 등 피해자 핵심 권리를 법에 규정하도록 권고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가 근본적으로 확보되지는 않았다. 2011년 법무부가 피해자 참가제 도입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당시 개정안에는 성범죄 등의 피해자나 피해자 변호사가 재판절차 참가를 신청해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검사 옆자리에서 피고인과 증인을 신문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유죄가 확정되기 전 피해자를 사건 당사자로 인정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는 주장과, 피고인의 방어권이 진실규명보다 앞설 수 없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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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와 피고인의 방어권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국가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커진 피고인의 방어권이 피해자의 입을 막는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변호사들은 지적한다. 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실제로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한 기본권 침해가 심각했던 시기를 굉장히 오래 거쳐왔고, 형사소송절차에서 피고인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던 시절도 있었다”며 “하지만 이것은 국가기관에 의해 침해당하는 피고인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최소한 피해자에 대한 권리 침해를 막는 제도라도 도입돼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피고인의 방어권과 피해자의 참여권이 상충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조윤희 법무법인 이채 변호사는 “피고인의 방어권은 국가의 형벌권 행사에 대한 것으로, 방어권이 보장돼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라고 말했다. 피고인의 방어권에는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공판에 출석해 진술할 권리, 법정에 나온 증인에게 반대신문을 할 권리 등이 포함된다. 이 중 어떤 것도 피해자가 통지를 받아 사건기록을 확인하고 의견을 진술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과 대립되지 않는다. 형사재판의 취지와 목적인 ‘실체적 진실 발견’에도 피해자 참여가 확대되는 것이 유리하다. 조 변호사는 “피고인이 허위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검사가 바로잡지 못하면 잘못된 판결이 선고될 수도 있다”며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선 피해자에게 충분히 진술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지금 진술권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형사사법절차의 또 다른 목적은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고 피고인만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은 피해자의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고통을 더욱 키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해를 회복하고 치유받을 길도 없다. 형사사법절차의 두 가지 목적인 피해자의 치유도 실체적 진실 발견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오지원 변호사는 “모든 피해자가 전부 법정에 나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 등 강력범죄, 중대사기 등 피해자의 고통이 너무나 명백한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원하는 경우 피해자 참여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뿐 아니라 사법신뢰, 치유와 직접 연결된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