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달러 내고 직접 끓인다… LA ‘라면바’ 이색 풍경
● 캠핑하며 ‘불닭 먹기’…美 청년 놀이 문화로 편입
● 핫소스 뿌리고 토르티야로 싸고…K-라면의 현지화
● 농심, 美 1위 마루찬과 1.9%포인트 차…바짝 추격
● 생일엔 불닭, 추수감사절엔 컵라면…선물로도 인기
● “미국에서 韓 라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
"불닭볶음면이요? 저한테는 너무 매워요. 그런데 좋아하는 한국 라면을 꼽으라면 역시 매운 라면이에요. 저는 라면을 끓일 때 파를 넣고, 가끔 숙주도 더해 먹어요. 한국에서는 술을 마신 다음 날 해장하려고 그렇게 먹는다고요? 저도 컨디션이 나쁠 때 그렇게 라면을 끓여 먹곤 하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먹는다니 흥미롭네요!"
10월 1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셀프 라면바 '슬러프앤드십(Slurp&Sip)'에서 만난 스포츠 에이전트 알렉스 씨의 말이다. 2024년 문을 연 이곳에서는 100여 종의 한국 라면을 골라 직접 끓여 먹을 수 있다. 가격은 한 그릇에 8달러 안팎, 조리는 손님 몫이다. 이날 이곳을 방문한 미국인들은 능숙하게 전용 조리기를 다뤄 라면을 끓였다. 다진 파와 고수, 할라피뇨, 라임, 얇게 썬 양파 등을 취향대로 곁들여 '나만의 라면'을 만들어 먹는 식이다. 야외 테이블에서는 라면을 먹는 손님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한국 편의.에서 볼 법한 풍경이 LA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8달러 내고 직접 끓인다… LA 라면바 이색 풍경
라면바를 방문한 이들에게 라면 조리는 낯설지 않은 듯했다. 조리기 옆에는 영어와 그림으로 라면 끓이는 법이 네 단계에 걸쳐 설명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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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가 끝나기 2분 전 달걀을 넣을 것" "달걀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저을 것" "치즈는 조리가 끝난 뒤 넣을 것" 같은 요령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안내문을 읽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익숙한 손길로 봉지를 뜯어 면과 스프를 그릇에 담고 조리기를 작동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크리스 씨는 "한국 라면의 매운맛과 풍미를 좋아하는 손님이 많으며, 불닭볶음면이 특히 유명하다"며 "틱톡 등 소셜미디어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도 상당수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한국 라면은 더는 한인만 찾는 음식이 아니다. 인기는 수출 실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농수산식품 수출액은 9월 초 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가운데 라면 수출액은 13억76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2% 증가했다. 미국은 중국 다음으로 한국 라면이 많이 수출되는 나라다. 알렉스 씨는 "한 번씩 동네 슈퍼마켓에서 불닭볶음면을 사 먹는다"며 "대부분의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미국 지역 마트에서도 한국 라면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찾은 LA의 한 대형마트에는 라면 진열대 한 줄이 한국 브랜드 제품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수백 개의 라면 가운데는 기자도 처음 보는 제품도 여럿 있었다. 매운맛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을 위한 입문자용 스와이시(swicy·sweet+spicy) 불닭볶음면은 물론 타코불닭볶음면과 콘불닭볶음면 등 현지 입맛을 노린 다양한 제품이 즐비했다. 이외에도 진라면 베지, 신라면 툼바 등 한국 기업에서 만든 다양한 라면이 선반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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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대 앞에 선 손님들은 봉지를 집어 들고 포장지를 살펴보다 이내 다른 맛으로 손을 옮기곤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라면을 많이 먹는 나라다.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전체 인스턴트 라면 소비량은 52억2700만 개다. 한국의 소비량인 40억6100만 개의 약 1.3배다. 하루 평균 1400만 개가 넘는 라면이 미국에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는 일본의 아성을 흔들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26 라면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미국 라면 시장 1위 브랜드인 일본 마루찬의 .유율은 26.8%로 전년보다 2.7%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2위인 농심은 20.3%에서 24.9%로 뛰어올랐다. 두 브랜드의 격차는 1년 만에 9.2%포인트에서 1.9%포인트로 좁혀졌고, 삼양식품 역시 불닭볶음면의 인기에 힘입어 。유율 9.5%로 3위에 올랐다.
캠핑하며 '불닭 먹기'…美 청년 놀이 문화로 편입
한국 라면을 접하는 공간도 다양해지고 있다. 10월 1일 찾은 LA의 '큐카페'에서는 음료와 빵뿐 아니라 라면도 팔고 있었다. 벽 한 면은 십여 종의 라면으로 채워져 있었고, 손님이 직접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 조리기도 놓여 있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인근에 위치한 이 카페는 미국 대학생들이 자주 찾는 지역 명소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 박얼 씨는 10여 년 전 대학생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브랜드 마루찬 라면을 주로 먹었다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구할 수 있는 라면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일본 라면을 먹고 있으면 한국인 친구들이 '이것도 라면이냐'며 타박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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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동네 마트는 물론 카페에서도 한국 라면을 골라 먹을 수 있다. 이날 박 씨는 직원의 추천을 받아 안성탕면을 끓여 먹었다. 그는 "한때는 불닭볶음면을 즐겼는데, 이제는 매운 라면을 먹으면 힘들다"며 웃었다. 그러고는 친구들과 즐겼던 이른바 '불닭 내기'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들과 캠핑을 가면 게임에서 진 사람이 불닭볶음면을 먹는 벌칙을 받곤 했다. 한 번은 일반 불닭볶음면보다 두 배 매운 핵불닭볶음면을 누가 더 빨리 먹는지를 두고 겨루기도 했다. 이긴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먹는 내기였다. 서둘러 먹고 차를 몰아 편의.에 갈 생각이었는데, 오 마이 갓! 급하게 삼켰더니 매워서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카페 사장인 샤론 씨는 손님들이 찾는 라면도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2년 전 라면 조리기를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불닭볶음면, 특히 까르보불닭볶음면을 찾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요즘은 진라면 같은 국물 라면도 인기가 많다"며 "아이들은 매운 걸 잘 못 먹으니 가족 단위 손님은 맵지 않은 라면을 고르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매운 라면이 외면받는 것도 아니다. 며칠 전 중학생 자녀 두 명을 데리고 이곳을 방문한 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일반 라면을 먹이고 자신은 핵불닭볶음면을 먹었다. 샤론 씨가 "맵지 않으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안 맵다"였다.
핫소스 뿌리고 토르티야로 싸고…K-라면의 현지화
2025년 10월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농심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협업 신라면 출시를 기념하는 캠페인을 열고 있다. 농심
라면을 즐기는 방식도 저마다의 입맛을 따라 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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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씨는 최근 카페를 찾은 젊은 여성 두 명이 라면 먹는 법을 서로 알려주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났다고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조리법을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씨 역시 한국 라면을 색다르게 먹는 법을 비(非)한국인 친구들로부터 배웠다. 함께 일하는 멕시코계 동료들이 김치라면에 멕시코 핫소스를 뿌려 먹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이 멕시코계 미국인에게 한국 라면 먹는 법을 배운 셈이다. 불닭볶음면을 토르티야로 감싼 후 잘게 다진 고수를 더하는 '불닭 브리토' 역시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이색 K-라면 레시피다.
한국 라면 열풍은 즉석조리기 판매로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내 라면 조리기 유통을 맡고 있는 샤론 씨에게 카페는 음료와 빵, 라면을 파는 매장이자 라면 조리 기기를 홍보하는 공간이다. 그는 네바다주 리노의 한 대학가 가게에도 라면 조리기를 공급했다. 해당 가게는 라면을 주력으로 김밥과 삼각김밥 같은 다양한 한국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샤론 씨는 전용 용기를 직접 배달하면서 판매 상황도 살핀다며 "학생은 물론 지역 주민들로 가게가 붐비더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이 방학일 때였는데도 우리 카페보다 장사가 잘돼 부러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에서 한국 라면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기업들도 생산 및 판매망을 넓히고 있다. 농심은 미국 현지 공장에서 라면을 만들어 대형 유통망에 공급하고 있다. LA 인근 캘리포니아주 랜초쿠카몽가에서 2005년 첫 공장을 가동한 데 이어 2022년 제2공장을 열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제품은 월마트와 코스트코 등에서 판매된다. 공장에서 만드는 라면도 신라면에 그치지 않는다. 돈코츠 스타일 라면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며 현지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을 앞세워 미국 대형마트의 매대를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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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마트와 코스트코에 이어 크로거, 타깃 등으로 판매처를 확대하고 있으며, 지난해 미국 판매법인 삼양아메리카의 매출은 5952억 원에 달했다. 늘어난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6월 경남 밀양2공장을 준공했고 상업 생산을 시작했다. 미국 소비자의 입맛을 겨냥한 제품을 개발하고, 평소 장을 보는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도록 유통망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 라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불닭볶음면은 미국에서 생일 선물로도 화제를 모았다. 2024년 텍사스에 사는 소녀 아달린이 생일 선물로 까르보불닭볶음면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영상이 SNS에서 1억 회 넘게 조회된 것이다. 이에 삼양식품은 분홍색 밴에 까르보불닭볶음면 1000여 개를 담아 보내 깜짝 파티를 열어줬다.
한국 라면을 선물로 건넨 경험은 우버 기사 장 씨에게도 있었다. 그는 과거 공장을 운영할 때 추수감사절이면 멕시코계 직원들에게 한국 컵라면을 박스째 선물했다고 한다. 장 씨는 "직원들이 '딸, 아들, 아내가 모두 좋아했다'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다니는 교회는 지금도 청년들이 진라면을 박스째 사다놓고 함께 먹고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매운 진라면을 즐겨 먹는다고 한다.
LA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 라면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었다. 입맛도 조리법도 달랐지만, 한국 라면은 이들에게 더는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라면바에서 일하는 크리스 씨에게 누가 주로 한국 라면을 먹으러 오느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Everyone. Pretty much everyone(다들요. 거의 모든 사람이요)"이었다. 옆에서 라면을 고르던 알렉스 씨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하는 즐거움도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한국 라면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해요.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건 정말 즐겁고 멋진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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