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박영기·김경임)이 함께 다니는 대구제일교회 근처 계명대 동산의료원 의료선교박물관 앞에서 다정히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어디고? 회사가? 일하나?”
2002년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통화를 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건네시는 질문이다. 평일이건 휴일이건 가리지 않는다. 한번은 시간을 내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아버지, 저는 토요일은 무조건 쉽니다”라고 말씀드려도 아버지의 질문은 여태껏 바뀐 게 없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 매번 갸우뚱했는데, 팔순을 맞은 아버지의 자서전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졸업식을 마친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해서, 칠순을 훌쩍 넘어 대형마트 환경팀원으로 고단한 노동의 인생을 마치실 때까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쉬는 날의 개념이 없었다.
월급 없이 일하던 약국 。원을 시작으로 해병대 입대와 월남전 파병을 거쳐, 제대하자마자 상경해 도배 일로 생계를 꾸리셨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리비아에서는 해외 근로자로, 귀국해서는 오랜 기간 철근공으로 일하셨다. 일이 끊기는 사이사이 탄광회사와 연탄 공장, 정수기 공장, 박스 공장에 이어 어머니가 옷가지 좌판을 펴시던 노.상 일도 도우셨다. 그렇게 거쳐 온 일터가 40여 곳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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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은 아버지가 그 많은 일을 하시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정성을 들여 해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끈질기게 버티셨다.
아버지가 자필로 쓰신 자서전을 옮겨 쓰면서 몇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1984년쯤, 땡볕이 수직으로 내리꽂는 사우디아라비아 근무 시절이다. 오침을 마친 뒤 트럭을 타고 사막 한가운데 공사 현장으로 향할 때, 숙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를 들으시며 고향 생각에 젖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원 정선 탄광촌에서 수직갱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백m 지하로 내려가기 직전, 혹시 못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주변의 산과 초목을 서둘러 둘러보시던 표정도 그려본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에서는 착륙을 앞두고 펼쳐진 눈 덮인 산하를 보면서도 ‘아, 아름답다’는 감탄사 대신 ‘이제 내일부터 뭐 해서 먹고 사나’ 하며 생계 걱정부터 하셨던 마음도 헤아려본다.
자서전에는 일이 없어 쉬는 날이면 ‘내가 이렇게 놀아도 되냐’며 불안해하는 가장의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어디고? 회사가? 일하나?
백경예시
” 아버지의 물음 속에는 번듯하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오랜 소망과 꿈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신다. 고생스러웠던 시절로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자랑할 것도 없다고 여기신다. 하지만 아버지가 걸어오신 삶의 여정은 1남 2녀 자녀들과 6명의 손주들에게 마주한 삶과 일 앞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길잡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아버지를 남편으로 두신 어머니는 매일 새벽같이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지를 위해 식사를 챙겨주시며 “잘 다녀오세요”라고 정성껏 배웅하시는 모습으로 한 가정의 가장을 존귀하게 세워주셨다.
아버지는 요즘도 일하신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몸이 불편하신 동갑내기 어머니를 옆에서 돌보시고, 크고 작은 집안일과 텃밭 일까지 도맡아 하신다. 사랑의 수고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땐 대한민국 동서남북을 두루두루 다니시며 노년의 봄날을 한껏 만끽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늦은 봄날을 힘껏 응원한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박재찬(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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