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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에서 먼저 거두는 수확
여름 끝자락이면 고구마밭은 줄기로 뒤덮인다. 뜨거운 볕을 받은 덩굴이 이랑을 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가을에 캘 땅속 고구마를 떠올린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보다 먼저 줄기를 걷었다. 껍질을 벗겨 데친 뒤 나물로 무치고, 된장에 지지고, 김치를 담갔다.
우리가 '고구마줄기' 또는 '고구마순'이라 부르며 먹는 부위는 식물학으로 따지면 잎과 줄기를 잇는 잎자루다. 덩굴 본줄기는 질겨서 먹기 어렵고, 연한 잎자루를 골라 딴다.
고구마가 이 땅에 뿌리내린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1763년(영조 39년) 통신정사로 일본에 가던 조엄이 쓰시마(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종자를 구해 부산진으로 보낸 것이 재배의 시작으로 꼽힌다. 조엄은 사행 기록인 '해사일기'에 고구마의 생김새와 저장법까지 적어 남겼다. '고구마'라는 이름도 쓰시마 사람들이 부르던 '고코이모'(孝行芋)에서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동래부사 강필리가 '감저보'를, 서유구가 '종저보'(1834)를 펴내며 재배법을 퍼뜨렸다. 흉년의 굶주림을 덜어주는 구황작물이 된 고구마는 뿌리만 쓰이지 않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땅 위로 무성하게 자라는 줄기도 소중한 찬거리였다.
늦여름 몸에 맞는 제철 채소
양생(養生)은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데서 출발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는 몸도 변화를 겪는다. 한여름 열기는 물러가도 낮 더위는 여전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실내 냉방과 바깥 더위를 오가다 보면 입이 마르고 장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쉽다. 이럴 때 수분 많고 부드러운 제철 채소를 밥상에 올리는 것이 계절에 몸을 맞추는 생활 속 양생이다.
약선(藥膳)에서는 고구마줄기를 성질이 평(平)하면서 약간 서늘하고 독이 없는 식재료로 본다. 비위에 작용해 열을 식히는 청열(淸熱), 장을 적셔 배변을 돕는 윤장통변(潤腸通便)을 효능으로 꼽는다. 풀어 말하면 더위로 생긴 열감과 갈증을 달래고 장을 편하게 하는 음식이다. 병을 고치는 처방으로 여길 일은 아니다. 제철 식재료로 몸을 돌보는 식생활의 지혜로 받아들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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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양학의 눈으로 봐도 고구마줄기는 쓸모가 많다. 수분과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칼륨, 칼슘, 마그네슘, 비타민C, 베타카로틴 등을 고루 품고 있다. 식이섬유는 장 운동을 돕고 포만감을 오래 유지해 준다. 칼륨은 몸속 나트륨 배출을 도와 전해질 균형을 지키는 데 필요한 영양소다. 짜게 먹기 쉬운 한식 밥상에서 칼륨 많은 채소는 좋은 짝이다. 다만 콩팥 기능이 떨어져 칼륨 섭취를 제한해야 하는 사람은 충분히 데친 뒤 물에 우려서 먹는 편이 안전하다.
열을 식히고 장을 부드럽게 한다는 약선의 설명과 수분·식이섬유·전해질을 말하는 영양학의 설명은 쓰는 언어가 다르다. 그래도 제철 채소를 건강한 식생활에 활용하라는 결론에서는 같은 자리에 선다.
고구마줄기는 손이 많이 가는 재료다. 질긴 겉껍질을 한 가닥씩 벗겨내야 한다. 여름날 평상에 둘러앉아 손끝이 거뭇하게 물들도록 껍질을 벗기던 풍경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껍질 벗긴 줄기를 데쳐 들기름이나 참기름, 다진 마늘, 국간장으로 볶다가 들깻가루를 풀면 고소한 들깨볶음이 된다. 된장과 멸치를 넣고 자작하게 지지면 구수한 밥반찬이 되고, 고춧가루와 마늘, 액젓에 버무리면 여름 입맛을 깨우는 김치가 된다. 고구마 줄기 김치는 호남 지방에서 특히 즐겨 담가 온 향토 김치다. 밥을 지을 때 손질한 줄기를 얹으면 곡식의 담백함과 채소 향이 어우러진 고구마 줄기 밥이 된다.
제철에 넘치도록 거둔 줄기는 삶아 말려 두었다가 겨울 묵나물로 다시 상에 올렸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묵은 나물 가운데 고구마순이 빠지지 않는 까닭이다. 여름에 남는 것을 겨울을 위해 갈무리하는 일, 그날의 넉넉함에 머물지 않고 계절의 순환을 내다본 살림살이가 곧 자연과 더불어 사는 양생이었다.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고구마 줄기 요리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선 중의 최선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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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지혜로 이기라는 가르침이다. 음식에 옮겨 보면, 자극적인 양념으로 입맛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조리보다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조리가 한 수 위다. 몸을 몰아붙이는 음식보다 몸을 자연스럽게 돕는 음식이 좋은 음식이다.
들깨 볶음이 좋은 예다. 들깨의 고소함이 줄기의 담백함을 감싸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운다. 들깨에는 오메가3 계열 지방산인 알파리놀렌산이 풍부해 들기름에서는 전체 지방산의 절반을 넘는다. 약선에서 들깨가 음식에 윤기를 더한다고 말하는 대목과 통한다. 식이섬유 많은 줄기와 좋은 지방을 품은 들깨가 한 접시에서 만나는 셈이다. 한 가지 음식에 모든 것을 기대하기보다 여러 식물성 식품을 함께 먹는 것이 건강한 식생활의 기본이다.
매운 볶음도 있다. 고추와 마늘, 양파를 넣으면 밋밋하던 줄기에 힘이 붙는다. 그러나 매운맛이 지나치면 줄기 고유의 맛을 덮어버린다. 손자가 힘을 과하게 쓰는 싸움을 경계했듯, 양념도 재료를 살리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고추는 음식에 활력을 보태는 조력자 자리에 둘 때 가장 빛난다.
무침은 더 단순하다. 데친 줄기에 간장이나 된장, 마늘,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짠맛과 마늘 향, 기름의 고소함이 줄기의 풋풋함과 어울린다. 고추장에 버무리면 발효의 깊은 맛이 밥 한 그릇을 부르고, 간장으로만 무치면 짠맛을 절제한 담백한 나물이 된다. 같은 줄기도 양념에 따라 성격이 바뀐다. '손자병법' 허실편은 "군대에는 정해진 형세가 없고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兵無常勢 水無常形)"고 했다.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길을 바꾸라는 뜻이다.
김치는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소금과 고추, 마늘, 젓갈로 버무린 줄기는 발효를 거치며 아삭한 식감 위에 깊은 풍미를 얹는다. 오래 두고 먹으려는 궁리가 맛까지 키운 셈이다.
고구마 줄기 밥에는 우리 밥상의 기본 원리가 담겨 있다. 주식인 곡식과 부식인 채소가 서로 돕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누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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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줄기는 어떤 양념과도 다투지 않는다. 삶으면 부드러워지고, 볶으면 고소해지고, 말리면 겨울을 견디고, 김치로 담그면 발효의 깊이를 얻는다. 제 성질을 지키면서 다른 재료와 어울리는 것, 고구마 줄기가 밥상에서 보여주는 미덕이다.
천천히 늙는 밥상의 뿌리
노자는 '도덕경' 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무리하지 않고 계절과 몸의 변화에 맞춰 사는 도가 양생의 뿌리가 여기 있다. 조상들의 밥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봄에는 새순을, 여름에는 물기 많은 채소를 먹었다. 가을에는 뿌리와 열매를 거두고, 겨울에는 말리고 저장한 음식으로 났다.
최근 몇 년 사이 '저속노화'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필자가 생각하는 저속노화 밥상의 뿌리도 이런 계절 밥상에 있다. 비싸고 특별한 음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가까운 들과 밭에서 제철에 나는 것을 골고루 먹고, 버리는 것을 줄이고, 몸의 계절에 맞춰 먹으면 된다. 천천히 늙는다는 것은 자연의 속도에 맞춰 몸을 오래 건강하게 쓰는 일이다.
모공편이 끝내 묻는 것은 어떻게 이기느냐다. 건강도 그렇다. 병과 싸우기 전에 평소 몸을 잘 돌보는 일이 먼저다. 젊음을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자연의 속도에 맞춰 먹고, 움직이고, 쉬는 것이 천천히 늙는 길이다.
고구마 줄기는 화려한 식재료가 못 된다. 그래도 한 줄기 안에 여름 햇볕과 농부의 땀, 어머니의 손맛, 가족의 밥상이 들어 있다. 넉넉하지 않아도 버리지 않았고, 오늘 먹을 것만 챙기지 않고 내일을 준비했다. 여름 줄기를 말려 겨울에 먹은 일은 절약이었고, 동시에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며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좋은 양생은 멀리 있지 않다. 더 좋은 것을 찾아 욕심내기보다 이미 곁에 있는 좋은 것을 알아보고, 필요한 만큼 먹고, 남은 것은 다음 계절을 위해 남겨두는 것. 늦여름 고구마 줄기 한 접시가 전하는 오래된 건강법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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