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오른쪽 사진)은 죽음을 앞둔 말년에 호암(湖巖) 이병철(왼쪽) 삼성 창업주가 타계 직전에 했던 24가지 질문에 답했다. 23세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생전 각별히 가깝게 지내진 못했으나 재계와 문화계 거목으로 대한민국 공동체에 큰 역할을 했다. 최근 미술품 경매시장에 호암의 서예작품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나오며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그에게 이 글씨를 쓰라고 권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그 김재순은 1960년대에 잡지 ‘새벽’을 만들며 이어령을 편집위원으로 영입한 인연이 있다. 연합뉴스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꼭 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됐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이 하는 안티 크리스천들은 경멸조로 묻고, 카뮈의 경우처럼 신 없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배신자를 대하듯 질책하는 투로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던 이어령(1933~2022)이 자신의 책에 토로한 말이다. 지난 2010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의 제목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신과 인간의 모든 권위에 대해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온” 무신론자였다. 그랬던 그가 2007년 74세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자, 한국의 대표지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 권세에 무릎을 꿇었다는 시각이 불거졌다.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는 “김승옥(소설가), 이장호(영화감독) 같은 ‘기독교 환자’가 또 나온 것이냐”라며 입을 비쭉거리는 이들도 생겼다.
이어령이 저서와 대담, 간증(干證)에서 수차례 밝힌 것처럼 그의 신앙 입문은 딸 이민아(1959~2012) 씨의 시련이 크게 작용했다. 민아 씨가 망막박리 증세로 실명 위기에 처했던 2006년의 어느 날, 그는 딸이 거주했던 미국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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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 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지난 2018년의 이어령(왼쪽)·강인숙 부부.
환하게 웃으며 죽음 받은 딸
민아 씨는 이어령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건국대 명예교수) 사이에 태어난 1녀 2남 중 장녀였다.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한 수재였던 그는 1981년 청년 작가 김한길과 결혼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아들을 낳고 1986년 이혼했으며, 1989년 재혼해 두 아들과 딸을 뒀다. 그 사이에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지역 부장검사까지 지냈다. 검찰에서 퇴임한 후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으나 곧 그만두고 청소년 복음 사역에 집중했는데, 그걸 반대한 남편과 이혼했다. 2009년 정식으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됐다. 미국과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 활동에 힘썼다. 2011년 위암 말기를 선고받고 투병하다가 이듬해 타계했는데, 환하게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애가 선택한 것은 모두 가시밭길이었다.” 그의 어머니 강인숙 관장은 2016년 펴낸 책 ‘민아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이 뭐라고 하건, 어떤 손해를 보건, 과감하게 ‘내 방식대로(in my fashion)’ 살았다는 것이다.
민아 씨가 미국에서 변호사, 검사, 또한 목사로 자기 길을 걷는 동안 지독한 질병의 시련이 뒤따랐다. 위암 이전에 이미 1992년에 갑상선암에 걸려 투병했다. 그때 장남의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판정도 함께 겪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2006년엔 자신이 망막박리 증세로 곧 실명한다는 의사들의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이어령은 딸의 병과 고통을 나중에 알게 됐다는 자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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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찾았을 때 자신이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잘 돌보지 못했음도 되돌아보며 탄식했다.
그는 딸에게 “미국 의사들은 손이 커서 수술을 잘하지 못하니 한국 의사들에게 보여야 한다”라고 강권했다. 이에 따라 서울에 왔던 민아 씨는 기적처럼 망막박리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마음이 홀가분해진 민아 씨가 하와이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새벽 기도를 하러 교회에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어령은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민아야, 나 세례 받는다고 해.”
그의 세례식은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에 의해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 이어령은 “국내에서 하면 언론이 취재하는 등 시끄러울까 봐 온누리교회가 선교 행사를 하는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 조용히 치르려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세례식에는 한국 기자와 신도들이 대거 몰렸다.
그 북새통에서 그는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인데도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울까. 슬픔인가, 감동인가, 회개인가, 혹은 감사인가. 모릅니다. …혼자 싸워왔는데 주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시며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주시고 깨진 무릎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넣어 주시는 것 같았지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새로 영접하는 주님이 잘 구별되지 않았고 그 그리움의 감정도 같았지요. ”
1981년 이화여대 졸업식에 참석한 이어령(오른쪽)과 딸 민아 씨.
어릴 때 느낀 ‘죽음의 감각’
세례식에서 떠올렸던 어머니. 그의 지성이 평생 파내려 간 우물의 원천이고, 동시에 영성의 모태였다.
그는 어릴 적에 혼자 보리밭길을 따라 굴렁쇠를 굴리다가 까닭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적막함에 휩싸여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그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매달리며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죽지 마.” 어머니의 답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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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 안 죽어.”
이어령은 그 유년의 눈물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품고 있는 본능적인 죽음의 감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
이어령의 영성 밑바닥엔 아내 강인숙 관장의 모태 신앙도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1952년 서울대 국문학과 동기생으로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해로하며 부부로, 문학 동지로 살았다. 강인숙은 어려서 동생이 죽는 경험을 했고, 나중엔 손자와 딸을 잃는 참척의 아픔을 겪었다. 이어령이 항암 치료를 거부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시간에도 동행했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을 것인가.
‘바람 한 。 없는 날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이어령은 죽음에 직면한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소멸 과정을 의연하게 직시하고 그걸 기록했다.
그는 영성에 기울었으면서도 지성을 버린 것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했다.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바울(기독교 교리 기초를 닦은 첫 신학자)은 베드로(어부 출신의 사도)나 제자들에 비해 지성과 이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과 베드로를 모두 쓰셨습니다.”
그는 지상의 마지막 1년도 지성인들과 대화하는 걸 무척 즐겼다.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김병종 작가는 그가 전화로 1시간 넘게 시대와 문명, 그리고 생명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지성사에 유일무이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이어령이 이병철(1910~1987) 삼성 창업주의 24가지 질문에 응답한 것도 한국 대표 지성으로서의 소명감 때문이었을까. 이병철은 말년에 지인을 통해 정의채(1925~2023) 몬시뇰(주교품을 받지 않은 고위 성직자)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했으나 답을 받지 못한 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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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은 한 언론이 그 질문을 전하며 답을 청하자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길 바란다”라며 응했다. 그 내용을 보완해서 나온 책이 ‘메멘토 모리’(2022)이다.
첫 번째 질문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에 대해 그는 “창조주가 없다면 우주 만물의 속성과 질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라고 답했다. 마지막 질문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에 대한 답은 “반드시 온다. 과학적으로 봐도 지구의 에너지가 무(無)로 돌아가는 날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농담처럼 덧붙였다.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사람은 스피노자가 아니에요. 마르틴 루터의 묘비명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남 위한 눈물이 희망의 씨앗”
이어령은 “죽을 때까지 사과나무가 아니라 언어의 씨앗을 우주에 뿌릴 것”이라고 했다. 그 씨앗의 하나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바로 발화했다. 아내 강인숙과 두 아들(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강무 백석대 교수)이 유고를 묶은 책을 세상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눈물 한 방울-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이어령은 여기에 이렇게 적었다.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이 흐르는 현실 속에 절실한 것은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다.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다.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다.”
이어령 선생의 생전 집필실. 컴퓨터 7대가 보인다. 영인문학관
컴퓨터 7대로 저술작업… 죽는 순간까지 ‘창조’
■ 이어령이 남긴 것들
이어령이 ‘문화 권력’이었던 것은 그가 힘을 지닌 지위에 집착해서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를 하며 창조와 변화의 동력을 우리 공동체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1963년 30세에 펴낸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일약 지성계 중심이 됐다.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지금도 한국 문화론의 기치를 세운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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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어령이 펼쳐낸 언어의 향연은, 한국어가 무한히 아름답고 풍성한 영감의 보고임을 실증했다.
1967년 남정현(1933~2020)의 소설 ‘분지’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을 때, 그는 법정에 나가 “용공적 작품이 아니다”라는 증언을 했다. 좌파 이념과 거리를 둔 평론가의 증언이어서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그는 훗날 “이념과 무관하게 오로지 문학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1982년에 나온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문화를 분석한 책이다. 하이쿠, 분재 등에서 보이는 축소 지향 전통이 워크맨, 피카츄 등의 산업 성공으로 나타났으나, 제국을 꿈꾸는 등의 확대 지향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지적했다. 일본어로 저술한 이 책은 한국인 저서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어령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괄 기획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슬로건 원안이 ‘화합과 전진’이었는데 그가 ‘벽을 넘어서’로 바꿨다. “자문단에서 난리가 났어요. ‘왜 벽을 넘냐, 우리가 도둑이냐?’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저 사람들이 무난하다면 별로인데, 안 된다고 기를 쓰니 되겠구나.”
개회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역시 그의 기획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혼자 나와서 정적이 감도는 경기장 중앙을 사선으로 지나가는 모습. 여백이 있는 1행시(詩)라는 평을 받은 이 장면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 소년이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재현됐다.
그는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행사 때 무보수로 대회가를 작사하고 각계 인사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사실은 스스로 입 밖에 내지 않았기에 사후에야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이어령은 노년에 서재에 컴퓨터 7대를 놓고 연구와 저술 작업을 했다. 그가 2006년 내놓은 책 ‘디지로그(Digilog)’는 직접 창안한 용어를 제목으로 했다. 세상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아날로그 시대는 끝났다”라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다른 이야기를 했다. “차가운 디지털에 따뜻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입혀져야 인류 미래를 위한 문명이 완성된다.”
리카, 남미,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