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주인공 공은태(이준혁)가 로또 당첨 후 상상 속에서 회사를 불 태우기 위해 석유를 뿌리는 장면. [사진 티빙]
평범한 직장인 공은태(이준혁)가 로또 1등에 당첨됐다. 19억에서 세금 제하고 13억2492만5855원이 입금됐다. 당첨금 수령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출근. 아래로는 나이 많은 팀원 양준호(서현우)에게 무시당하고, 위로는 사내 정치에 휘말려 일을 떠안던 그였다. “로또는 화를 내지 못하며 살던 나의 삶이 나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라며 사무실에 들어선다. 마침 。심시간 한참 전부터 게장을 먹겠다며 사라진 팀원들. 당장 사무실 복귀를 지시한 그는 팀장 달고 처음으로 양준호를 크게 혼낸다. “‘적당히’라는 건 내가 아니라 네가 했어야지!”
지난 10일 티빙에 공개된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한 장면이다. 큰돈이 생겼어도 무심히 출근하는 공은태는, 회사에 다녀도 정신적·경제적으로 종속되고 싶지 않은 이들의 판타지다.
쿠팡플레이 시트콤 '직장인들' 시즌3에 출연한 백현진과 차정원. [사진 쿠팡플레이]
지난달 29일부터 시즌 3가 시작된 쿠팡플레이 시트콤 ‘직장인들’은 아예 ‘월급 루팡과 칼퇴를 꿈꾸는 DY기획 직원들의 리얼 오피스 생존기’를 슬로건으로 한다. 현봉식·김민교·이수지·김원훈·지예은 등은 근무 시간 중 틈틈이 보유 주식 시황을 체크하고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며, 황금연휴 연차를 사수하기 위해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인다. 김원훈은 대학생 서포터즈 노재원 앞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를 중소기업이라고 서슴없이 낮춰 부른다.
드라마 '최애의 사원'의 남다름 역을 맡은 배우 김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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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vN]
회사의 안정성이나 규모도 중요하지 않다. 지난 8일 종영한 ‘최애의 사원’(tvN) 주인공 남다름(김혜준)에게는 일보다 ‘덕질’이 중요하다. 안정적인 대기업을 버리고 12년간 팬이던 아이돌 이찬(차우민)이 사내이사 겸 패션디렉터로 있는 작은 회사에 들어간다. 불합리한 조직 문화도 참지 않는다. 지난 7월 종영한 ‘신입사원 강회장’(JTBC)은 70대의 최성그룹 회장 강용호(손현주)가 불의의 사고 후 20대 청년 인턴 황준현(이준영)의 몸으로 살아가는 설정이다. 지시를 내리던 사람이, 이제는 조직의 말단에서 부당한 회사 문화를 몸소 겪으며 깨부순다. 연차 날 회식에 끌려 나오자 회식 금지를 놓고 상사에게 술 내기를 거는 식이다.
드라마 '신입사원 강회장'에서 연차 날 회식에 불려 나온 황준현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사진 JTBC]
회사란, 일이란 무엇인가. 드라마가 회사와 개인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신 손자병법’(1993~1994, KBS2) 등 지난 세기 드라마 속 회사는 또 하나의 가정. 조직 생활에서의 갈등과 화해, 동료애를 훈훈하게 그렸다. 2000년대 이후 드라마인 ‘직장의 신’(2013, KBS2), ‘미생’(2014, tvN), ‘송곳’(2015, JTBC)은 다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고용 불안, 조직 내 권력관계, 노동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재근 평론가는 “IMF 사태, 외환위기를 거치며 평생 직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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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사회에 퍼진 각자도생의 개인주의가 드라마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그래도 직장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회사에서 살아남아 정규직이 되고 임원으로 승진하는 게 중요하게 그려졌다.
드라마 '미생' 주인공 장그래는 2년 계약직 사원이었다. [사진제공=tvN]
요즘 드라마는 더이상 ‘회사=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해 방영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JTBC)은 25년 동안 대기업에 몸담은 김낙수 부장(류승룡)이 퇴직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회사에서의 성공=인생의 성공’이라는 등식을 흔들었다.
인물들의 선택도 달라진다. 회사를 떠나는 것, 혹은 충성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었다. 올 7월 종영한 ‘내일도 출근!’(tvN)에서 사내 커플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불합리한 일을 당했던 강시우(서인국)는 스타트업 행을, 차지윤(박지현)은 회사에 남아 조직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쪽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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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평론가는 “회사와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지 않는 직장인의 고민이 오피스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성공할까’에서 ‘회사와 내 삶을 어디까지 분리할까’로 질문이 옮겨갔고, 회사를 다닐 이유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회사를 예전과 똑같이 대할 필요는 없다는 트렌드가 캐릭터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관행에 대한 반발심과 회사에 소속돼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를 함께 갖고 있다”며 “로또 1등에 당첨돼도 서울 집 한 채 사기 힘든 현실에서는 퇴사만이 답은 아니기 때문에 노조 가입 등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히면서도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2030세대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7월 종영한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