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는 영국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낡고 친숙한 펍(Pub) ‘더 정글’(The Jungle)dl 통째로 들어서 있다. 관객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바텐더가 탭에서 갓 뽑아낸 맥주를 받아 들고 배우들과 뒤섞인다. 경쾌하게 부딪치는 잔 소리와 웃음소리가 극장을 채우는 사이, 어디까지가 대기 시간이고 어디부터가 공연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비영어권 최초의 한국어 공연으로 지난달 18일 막을 올린 뮤지컬 ‘콰이어 오브 맨’은 이렇게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관객을 펍 한가운데로 끌어당긴다.
뮤지컬 '콰이어 오브 맨' ⓒ신시컴퍼니
무대를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은 기승전결이 아니라, 아홉 명의 배우가 뿜어내는 ‘리듬’이다. 바 테이블을 내리치는 손바닥, 맥주 잔을 부딪히며 내는 울림, 테이블 위에서 이어지는 거친 탭댄스가 모여 타격감을 만든다. 맥주잔과 의자, 쟁반은 물론 대걸레까지 악기가 되고, 대사 사이의 짧은 침묵조차 잔 부딪히는 소리로 메워진다. 펍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흔히 듣는 시시콜콜한 소음들이 고스란히 음악의 일부가 되는 식이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건 관객의 귀에 익숙한 팝과 록, 포크 명곡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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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섬바디 투 러브’, 건즈 앤 로지스의 ‘웰컴 투 더 정글’, 시아의 ‘샹들리에’ 등 시대를 넘나드는 16곡이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우쿨렐레 등 밴드 라이브와 어우러지며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끼어든 한국 가요 ‘제발’은 이번 한국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넘버다.
각자 맡은 역할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의 얼굴을 띠고 있다. 극을 이끄는 이야기꾼 ‘포엣’, 감성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로맨틱’, 분위기 메이커 ‘조커’, 음악을 이끄는 ‘마에스트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존재감을 지닌 ‘하드맨’, 거대한 체구에 의외의 순수함을 지닌 ‘비스트’, 더 정글의 바텐더 ‘바맨’, 뭐든 고쳐 내는 ‘핸디맨’,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미워할 수 없는 ‘보어’가 그들이다.
뮤지컬 '콰이어 오브 맨' ⓒ신시컴퍼니
흥미로운 건 이 배역명은 ‘별명’으로, 극이 흐르면서 배우들은 자신의 실제 이름으로 불린다. 하이라이트인 ‘홈 스피치’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직접 써 낸 ‘집’에 관한 이야기가 무대에 오른다.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배우 자신의 이야기로 끝나는 셈이다.
특정 주연이 스포트라이트를 독.하는 법은 없다. 아홉 명의 배우들은 퇴장 없이 100분 내내 무대를 지키며 노래를 고르게 나눠 부르고, 서로의 목소리에 화음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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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모여드는 펍 특유의 끈끈한 공동체가 음악의 구조 그대로 무대에 옮겨진 듯하다.
과장된 서사나 억지로 쥐어짜 낸 갈등은 아예 덜어냈다. 이야기꾼 포엣의 내레이션을 따라 펍의 단골들이 일상을 나누고, 저마다 품은 못난 구석과 실연의 상처, 내일을 향한 막연한 불안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고민이 말끔히 풀리지는 않는다. 다만 맥주 한 잔과 노래 한 곡으로 그 무게를 함께 나눠 질 뿐이다.
뮤지컬 '콰이어 오브 맨' ⓒ신시컴퍼니
관객을 무대 위로 부르는 연출도 펍의 분위기 안에 매끄럽게 녹아있다. 즉석에서 고른 관객을 바 테이블에 앉혀 한 곡 내내 극의 일부로 만들거나, 세레나데의 주인공으로 세우기도 한다. 관객이 당황해 엉뚱한 반응을 보이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도, 배우들은 능청스럽게 그 순간마저 극의 리듬 안으로 끌어들인다. 같은 공연이 두 번 반복될 수 없는 이유다.
‘콰이어 오브 맨’은 누구의 고민도 해결해 주지 않고, 교훈을 남기려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배역의 이름을 내려놓은 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각자의 하루를 버텨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땀 흘려 노래하는 100분을 보여줄 뿐이다. 위로는 그 모습을 지켜본 객석에서 저절로 피어난다. 애써 다가오지 않기에 온기는 더 오래 남는다. 공연은 2027년 1월 3일까지 서울 놀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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