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달 대전에서 당뇨약을 타갔다고요?”
수도권에 사는 김수빈(가명·35)씨는 지난 2월 감기 진료를 받던 중 의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자신이 이미 대전의 한 내과에서 한 달치 진통제를 처방받았다는 것이다. 그럴 리 없었다. 김씨는 해당 시기에 병원은커녕, 대전을 방문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 대량의 약을 처방받을 만큼 특별한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씨는 황급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그간의 처방 내역을 조회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타 간 약은 진통제뿐만이 아니었다. 최대 180일치 분량의 각종 당뇨약, 혈압약 등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전문의약품 4종이 추가로 처방돼 있었다. 김씨는 두려운 마음에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훔쳐서 약을 처방받은 A씨였다. A씨는 곧바로 사과를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지인 B씨로부터 자신의 친조카 정보라면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받았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병원과 약국에서 이를 활용해 비대면 진료와 처방을 받았다는 설명이었다. A씨는 “정말로 B씨가 자신의 조카 정보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며 “대리 처방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B씨는 동남아 제3국에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주민등록번호까지 바꿔야 했다. 김씨는 2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주민등록번호 바꾸는 게 뭐가 대수일까 싶었는데, 막상 바꾸고 나니 일상의 거의 모든 곳이 흔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어느 것 하나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닌데도 내 일상을 하나하나 다시 맞춰야 했다”고 토로했다. 주민등록번호를 바꾼 뒤 은행, 관공서, 보험, 통신 등과 관련된 각종 서류와 인증서를 정비해야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과 스트레스성 후두염까지 얻게 됐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새어나와 누구를 거쳐 전달됐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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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피의자인 B씨가 해외에 거주 중인 탓에 수사는 잠정 중단된 상태다. 다만 텔레그램이 유력한 유출 경로 중 하나로 지목된다. 경찰도 B씨가 텔레그램에서 유통되는 불법 개인정보를 통해 김씨의 개인정보를 입수해 활용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휴대전화 번호 등 개인정보가 올라온 곳은 텔레그램의 A채널이었다. 지난 1월 개설된 A채널에는 총 190명의 이름과 주민번호, 휴대전화 번호가 공개돼 있었다. 이 채널의 구독자는 20여명에 불과하지만 해당 게시물의 조회수는 수백 회에 달했다. 채널 밖에서 여러 차례 유포돼 확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김씨를 비롯한 190명의 개인정보는 지금도 텔레그램을 통해 어디론가 퍼져나가고 있다.
국민일보는 정보보안기업 케이프랩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화이트해커 양성 프로그램 ‘화이트햇스쿨’ 출신 위협분석그룹 ‘다크넷즈’로 구성된 공동분석팀과 함께 2개월 개인정보가 불법 유통되는 다크웹·텔레그램 등 암시장을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했다.?개인정보가 유출된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2차 피해 실태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공동분석팀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공유되고 있는 텔레그램 채널과 계정 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고통받는 개인정보 피해자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가 무차별적으로 게시된 텔레그램 채널방. 텔레그램 캡쳐.
마약 사건의 참고인으로 경찰 출석 요구를 받은 최영진(가명·37)씨도, 9개월째 의문의 전화에 시달리고 있는 박수진(가명·39)씨도 알고 보니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휴대전화 번호까지 텔레그램에서 무분별하게 유포된 피해자들이었다.
최씨는 지난 7월 경찰로부터 참고인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죄명은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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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사건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던 경찰은 여러 건의 무통장 송금 내역 중 최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발견했다. 마약 사건 피의자가 은행 ATM 기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마약 대금을 보냈는데, 자신의 휴대전화 정보로 최씨의 번호를 적어둔 것이다. 서류상으로는 최씨가 마약 대금을 송금한 것으로 된 것이다.
하지만 최씨는 마약을 구매한 사실도, ATM기에서 돈을 보낸 사실도 없었다. 최씨는 경찰에게 “만약 내가 정말 마약 대금을 보냈다면, 내 번호를 남겼겠느냐”고 항의했지만, 경찰은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참고인 조사는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찰의 출석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최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사건 발생 당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고, 폐쇄회로(CC)TV 영상까지 제시하면서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을 입증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박씨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에 8개월째 고통을 받고 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는 건 주로 밤 10~11시쯤. 전화를 받아도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지만, 어느 날 상대가 “수진아”라고 이름을 부르는 문자를 보내자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섭기도 했고, 화도 났다.
박씨는 거꾸로 전화를 걸어봤다. 상대는 전화를 받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9초 동안의 통화에서 들려온 것은 차 안에서 운전하는 듯한 소리뿐이었다. 누구냐고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박씨가 항의하듯 반응하자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으면 상대는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씨는 같은 사람의 짓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살펴보니 수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월부터였다. 텔레그램 A채널에 박씨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가 게시된 것은 1월 31일. 텔레그램에 개인정보가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 모를 사람으로부터의 불쾌한 연락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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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다. 그는 “의문의 번호로 전화가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것도 무섭지만, 대포통장 개설 등 다른 범죄에 개인정보가 악용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고 털어놨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신청도 급증
개인정보가 다크웹과 텔레그램 등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포되면서 사기나 해킹 등 2차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자체를 바꾸는 피해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정부는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로 생명·신체나 재산 피해를 입었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때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해준다. 심사는 최대 3개월이 걸리고, 신청인이 직접 피해 사실 등을 입증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주민등록번호 변경 신청 2235건 가운데 재산피해 관련 신청은 1988건(약 89%)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재산피해 관련 신청은 보이스피싱, 신분도용, 사기·해킹 등 기타로 분류된다. 대부분 개인정보 유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항목들이다. 5년 전(2020년 868건)에 비해 대폭 늘었다.
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주민등록번호 변경 신청 심사·의결 사례’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C씨는 어느 날 갑자기 수급 자격을 잃었다. 소득이 생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서류상 그는 D업체에서 200만원, F업체에서 300만원 등 모두 500만원의 근로소득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두 곳 모두 일한 적 없는 업체였다. 누군가 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활용해 근로소득을 허위 신고한 것이다. 번호가 어디서 유출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위원회는 C씨가 신분 도용으로 인해 재산 피해를 본 것으로 인정해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의결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화이트해커 양성프로그램 화이트햇스쿨에서 멘토로 활동하는 김다솜 화이트해커는 “개인정보가 악용된 경우 어떤 경로로 유출됐는지 그 경로를 일일이 확인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다크웹과 텔레그램 등에 노출된 개인정보가 반복적으로 재유통되면서 2차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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