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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예박물관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이곳은 전시뿐 아니라 공간 자체가 참 좋다.
원래 옛 풍문여고 건물을 고쳐 2021년에 열었고, 조선왕실의 안동 별궁이 있던 자리다. 전시장을 걷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면 북촌과 안국 일대의 풍경이 한 。의 작품처럼 눈에 들어온다. 이 터가 품은 시간이 겹쳐 있어서인지 풍경이 더 깊어 보인다.
▲ 서울공예박물관의 창문?장응복 작가의 작품 뒤 창문 풍경
ⓒ 최수안
20일, 아직 완전히 노랗게 물든 것은 아니지만, 초록 사이로 노란빛이 번져 가는 나무들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이제 가을로 향해 가고 있는 색이다. 박물관의 밖은 코스모스가 다양한 색을 뽐내며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평일 오전이라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었다.
한로는 10월 8일이었고, 상강은 10월 23일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한로를 지나 상강으로 가는 길목이다. 한로(寒露). 차가운 이슬. 상강(霜降). 서리가 내린다는 이름.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딱 맞는 전시를 보러 갔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에퀴녹스: 추분_춘분>이다. '에퀴녹스(Equinox)'는 춘분과 추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를 뜻한다.
ⓒ 서울공예박물관
장응복은 전통과 현대, 공예와 건축을 함께 풀어내는 텍스타일 디자이너이다.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발견한 무늬와 색을 현대의 생활공간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천연재료로 염색을 하고, 패턴을 만들고 조각을 잇는다. 민화와 문인화, 항아리와 꽃신 같은 생활 문화의 무늬와 이미지가 전시장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의 무늬는 단순히 패브릭 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가구와 만나고 때로는 공간 전체가 된다.
전시 공간은 1부 '무늬집' , 2부 '집 속의 집' , 3부 '탑돌이' 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의 계단을 오르면 '탑돌이'라는 둥근 공간이 있다. 쪽빛의 천으로 만든 '바다'와 '그리운 금강산'이 그 둘레를 감싸고, 관람객은 탑을 돌듯 그 안을 천천히 걷는다.
'바다'는 국가무형유산 염색장 정관채와 함께 물들인 천이다. 쪽잎에서 우러난 푸른빛이 몇 번이고 물에 잠겼다 마르기를 되풀이하며 얻은 색. 그 색이 너무 아름다웠다.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우산장 윤규상과 함께 작업한 <낭화 지우산 샹들리에>에서는 그 오묘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 < 낭화 지우산 샹들리에>?한지, 대나무로 만든 작품
ⓒ 최수안 (사진)
'무늬집'에서는 장응복의 대표작 '조각잇기-벽'이 있다. 72개의 나무틀에는 실크와 한지와 유리가 끼워져 있고, 그 안에서 십장생과 모란, 꽃신과 물고기, 부채와 숟가락이 저마다의 리듬으로 반복된다. 숟가락이 무늬가 될 수 있다니. 밥상 위의 숟가락과 장롱 속 꽃신이 같은 벽에 나란히 걸리자 '생활이 곧 무늬'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 <무늬집>?장응복의 100여 종 무늬를 볼 수 있다.
ⓒ 최수안(사진)
'집속의 집'에서는 이십사절기 화문석에서부터 은행나무라는 작품들이 있다. 한국적인 것이 유행인 요즘, 작가는 옛것을 그대로 복원하지도, 지우지도 않는다. 오래된 무늬와 재료, 생활문화 속에서 오늘에도 살아 움직일 수 잇는 감각을 찾아낸다. 전시를 보니 '공예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 < 집속의 집 >?장응복. 서울공예박물관
ⓒ 최수안 (사진)
"디자이너로서 공간을 위한 일을 해왔고, 그 안에 공예를 녹여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작가의 말처럼 장응복의 무늬는 패브릭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구와 만나고, 때로는 공간 전체가 된다.
근래 본 어떤 전시보다 작품들 앞에 오래 머물렀던 것 같다. 창가에서 흔들리던 쪽빛 천들이 춤을 추는 순간들. 그리고 유난히 창밖을 많이 바라보았던 순간들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 서울공예박물관?전시장의 창문과 전시된 작품이 함께 한 .의 작품같이 보인다.
ⓒ 최수안
사실 이번 주쯤이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가을의 절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한낮엔 여전히 덥다. 여름인지 가을인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때, 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분명히 다른, 그런 날들.
어느 날 갑자기 가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아침 바람이 달라지고, 해가 짧아지고, 늘 지나던 집 앞의 나무가 노랗게 변해간다. 그러다 어느새 낙엽이 발 밑에 가득하다.
1년을 보통 네 개의 계절로 말하지만, 옛 조상들은 한 해를 24절기로 나누었다. 1년에 스물네 개의 이름이 있는 셈이다. 조상들은 대략 보름마다 계절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기에 한 달은 너무 길기도 하고, 하루는 너무 짧다. 보름쯤 지나면 세상의 계절이 어김없이 달라져 있기 때문에 24절기의 이치가 흥미롭다.
'가을'에는 백로가 있고 추분이 있고 한로가 있고 상강이 있다. 네 개의 다른 얼굴을 가진 가을이다.
다음 주면 이 동네도 노랗게 뒤덮여 있을 것이다.
10월 20일, 은행잎이 초록에서 노랑으로 넘어가는 중. 이런 달력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시간을 확인하는 달력이 아닌 눈을 들어 주위의 색을 바라보게 만드는 달력이 있으면 좋겠다.
전시장에서 다시 창밖을 보았다. 다음 주에는 서울의 유명한 은행나무 스팟에 아침 일찍 나가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지인과 이야기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꼭 샛노란 은행나무여야 할까? 초록에서 노랑으로 건너가는 지금도 하나의 계절이고,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장응복은 10년간 자연의 빛과 색을 기록하고 그것을 24절기로 나누고 색과 무늬로 정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절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72개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 계절의 색깔과 무늬가 있는 이 전시를 꼭 추천하고 싶다.
전시는 9월 22일, 추분 무렵에 문을 열었고 내년 3월 7일, 춘분을 앞두고 닫는다. 낮이 밤에게 자리를 내주는 날에서 시작해, 다시 낮이 길어지는 날 앞에서 끝나는 전시이다. 한로와 상강 사이에 이곳을 찾은 나는 그 반년의 아주 이른 페이지를 넘긴 셈이다. 춘분 무렵에 한 번 더 와야겠다. 그때 서울공예박물관의 창 밖은 어떤 모습일까.
▲ 서울공예박물관 카페에서 바라본 가을?어린이 박물관 4층
ⓒ 최수안
전시 정보
현대공예 기증특별전 <에퀴녹스: 추분_춘분>
구성: 1부 '무늬집' / 2부 '집 속의 집' / 3부 '탑돌이'
기간: 2026년 9월 22일 ~ 2027년 3월 7일
장소: 서울공예박물관 기획전시실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4)
관람: 화~일 10:00~18:00 (월요일 휴관) / 무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관람객은 탑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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