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훈 목사가 최근 경기도 안산 시냇가를심은교회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17년을 중소형 교회 부교역자로 산 윤지훈 목사는 어느 날 휴대전화 연락처를 훑어보다 멈칫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의 번호가 없었다. 에어컨 수리 기사 정도가 전부였다. 윤 목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될 것 같아 두려웠다”고 말했다.
1970~80년대는 예배당을 세우면 사람들이 찾아오던 때였다. 그 시절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웠던 윤 목사의 부친은 2000년대 초 천안에서 다시 개척에 나섰다. 지하 예배당을 연 지 석 달 만에 2000만원 넘는 빚을 졌고, 교회는 1년 반 만에 문을 닫았다. 윤 목사는 “예배당부터 마련해 놓고 사람을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요즘 세대를 만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8년 그는 경기도 안산의 문 닫은 호프집 자리에 카페를 열었다. 교회 간판을 내걸기보다 카페 사장으로 동네에 첫인사를 건넸다.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동네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2년여 뒤 그 카페에서 5~6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한 시냇가에심은교회는 2022년 김희범 목사가 이끌던 움직이는교회와 하나가 되어 공동목회 4년째를 맞았다. 지금은 주일마다 130~140명이 모인다. 아이들을 뺀 교회 성도 평균 나이는 31.5세다.
최근 안산 시냇가에심은교회에서 만난 윤 목사는 “교회를 부정하고 나간 게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는 마음으로 동네의 이웃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길을 택하기까지는 두 교회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개척교회, 그리고 부교역자로 섬긴 교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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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개척에서 배운 것
윤 목사는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다. 부친은 16세에 예수를 믿은 집안의 첫 신앙인으로, 20대에 전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웠다. 부친은 그 시절을 “북만 쳐도 아이들이 모이던 시대”로 기억한다.
부친은 중학생이던 아들을 앉혀 놓고 “나는 너한테 10원 한 장 물려줄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너는 주의 일을 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 일을 해 주실 거야”라고 말했다. 왜 이 일을 하느냐는 물음에는 “살면서 한 영혼 구원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돈 빌리 그레이엄 서울전도대회 모습. 국민일보DB
그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윤 목사가 2000년 천안대(현 백석대) 신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부친이 천안에서 다시 시작한 개척은 교통사고로 진 빚에 무너졌다. 가족은 흩어져 살았고, 부친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윤 목사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군 입대를 택했다.
군 복무를 하던 그는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냐”고 물었다. 부친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걸 내가 어떻게 부정하냐”고 답했다. 윤 목사는 “사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며 “개척교회를 하는 아버지의 어려움을 다 봤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는 계속 목회의 길을 걸어갔다”며 그게 감사하다고 했다.
복학 뒤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용불량자 신세로 공장과 PC방,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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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던 그를 붙잡아 준 건 당시 백석대 이동수 교수였다. 이 교수는 자신의 한 달 월급인 200만원을 현금으로 건네면서도 “목회자가 남의 도움에 기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가서 돈 버는 일이라도 하라”고 따끔하게 일렀다. 도움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길을 찾으라는 당부였다. 윤 목사는 “그 말이 목회하는 내내 오래 남았다”고 했다.
명절에 고모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된 걸 보고도 목회를 하겠느냐”며 말렸을 때, 유일한 신자였던 넷째 고모만 그의 무릎을 치며 “무릎이 깨져야 산다”고 했다. 기도가 윤 목사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과 격려였다.
부교역자 17년, 그리고 세월호가 남긴 질문
윤 목사는 17년간 성결·감리·예장통합·합신·순복음 등 교단을 가리지 않고 주로 중소형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했다. 그는 “섬긴 교회의 담임목사님들은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다”며 “다만 교회가 성장하던 시대라 모든 것이 교회 안을 향했고, 목회자 한 사람에게 많은 결정이 모였다. 그 과정에서 성도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전해지지 못하는 모습도 봤다”고 돌아봤다.
한 교회에서는 형편을 넘어서는 건축을 추진하면서 교인들이 적잖은 부담을 나눠 졌다. 집 담보까지 잡히면서 교회에 헌금을 했던 한 교인이 20대 전도사였던 그에게 조심스럽게 “이게 맞느냐”고 물었다. 윤 목사는 “교회가 무엇을 하든 성도의 삶부터 살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고 말했다.
전남 진도 팽목항. 국민일보DB
교회 안에서 이런 고민을 품었다면, 교회 밖을 향한 질문은 세월호 참사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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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목사는 2010년부터 안산의 한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고, 그의 제자였던 단원고 학생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참사 직후 그는 제자의 누나와 함께 진도로 내려가 손을 잡고 기도했다. 며칠 뒤 새벽, 진도체육관에 들어온 구급차에서 누나는 동생의 주검을 확인했다.
그해 안산은 도시 전체가 장례식장 같았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책가방을 멘 채 빈소를 찾았다. 윤 목사는 “처음엔 안산의 교회들이 유가족과 함께 울었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유가족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유가족은 함께 울어 달라고 했는데, 교회도 그 큰 슬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며 “오래 이어지는 애도를 교회가 감당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때 재난 앞에서 교회가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 무렵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됐다. 윤 목사는 2000년대 후반을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차갑게 식기 시작한 때로 기억한다. 그는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교회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돌아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간판 대신 이웃으로… 카페가 교회가 되기까지
카페 ‘이룸’은 석 달간 커피를 배워 연 가게였다. 윤 목사는 “카페 교회가 아니라 커피에 공동체를 더한 곳이었다”며 “동네 어른들이 상처 입은 이웃을 품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며 이게 교회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일터가 곧 선교지라는 생각에 커피 맛부터 챙겼다. 동네 엄마들이 잠시 볼일을 보는 동안 아이들을 봐 줬고, 옆 경쟁 카페 앞 담배꽁초까지 치웠다. 모임 장소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공간을 싸게 내주고 과일을 깎아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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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쌓인 관계는 뜻밖의 순간에 드러났다. 2020년 초 신천지 사태 때 동네에는 이룸이 신천지와 관련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근처에 이름이 같은 신천지 관련 시설이 있다는 말이 퍼지면서다. 소문을 막은 건 단골 엄마들이었다. 이들은 “그 사장님이 그럴 리 없다”며 나섰고, 한 단골은 “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윤 목사는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카페 이룸에서 모임을 하던 모습. 윤 목사 제공
같은 해 4월 카페에서 5~6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반년 만에 20명 가까이 모였고, 그중 3분의 1은 교회에 다니지 않던 이들이었다. 이들을 교회로 이끈 건 카페에서 쌓아 온 관계였다. 이웃으로 지낸 시간이 곧 전도가 됐다. 윤 목사는 “와 보니 따뜻하고 무엇보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던 곳이 그대로 교회가 되니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예배는 카페라는 공간과 모인 사람들에 맞춰 새로 꾸렸다. 테이블에 커피와 간식, 성경을 두고 둘러앉았다. 예배 전 20분은 한 주간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다. 교회는 이듬해 5월 설립예배를 드렸다.
쉽지 않다는 공동목회, 4년째
교회에서 함께 공동목회를 하는 김희범 목사는 윤 목사가 개척 모델을 찾던 2017년에 만난 안산의 청년 사회활동가다. 공간과 교육, 후원을 엮어 청소년들을 만나던 그의 방식은 카페 이룸의 밑그림이 됐다. 이후 신학을 공부해 움직이는교회를 세운 김 목사와 윤 목사는 2022년 봄 동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고, 몇 달간 함께 예배를 드린 끝에 두 교회를 합쳤다.
교계에서는 공동목회를 쉽지 않은 길로 본다. 두 목회자의 뜻이 갈리면 교회도 나뉘기 쉽다는 우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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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지.을 먼저 봤다. 윤 목사는 “저는 교회에서 사회로 나아갔고 김 목사는 사회에서 교회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목회 현장의 경험과 사회에서 다진 운영 역량이 서로를 채운다. 윤 목사는 30~40대 가정 그룹인 ‘윗마을’을, 김 목사는 청년 공동체 ‘아랫마을’과 교회 운영을 주로 맡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를 깨우는 종이다. 윤 목사는 “목회가 커지다보면 어느 한 사람이 초심을 잃을 수 있다. 그때 공동 목회에선 다른 한 사람이 이를 멈춰 세울 수 있다”며 “서로 존중하며 걸어가다 보면 스스로 합리화했던 것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윤 목사와 김 목사도 부딪힘이 없을 수는 없지만, 교회를 이끌어가는 큰 방향에는 한 마음 한 뜻이라는 게 윤 목사의 설명이다.
윤지훈(왼쪽) 목사와 김희범 목사가 경기도 안산 시냇가에심은교회 앞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 목사 제공
교회는 통합 1년 만에 40명에서 90명으로 늘었다. 교회에서 30~40대 소그룹인 ‘윗마을’은 코로나19 이후 교회로 돌아오지 못한 30대 가정을 위한 예배를 열자는 김 목사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재정은 처음부터 공개했고, 교인들이 스스로 헌금을 늘려 교회는 자립했다. 간판에는 교회 이름 대신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을 담아 ‘문화공간 시심’을 달았다. 교회 강단에 흔히 보이던 십자가도 두지 않았다. 두 목사는 공동체의 생명력을 잃으면 분립하든 조직을 바꾸든 멈추자고 뜻을 모았다.
윤 목사의 부친은 지금도 강원도 홍천에서 작은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 아들도 언젠가 다시 개척의 자리로 돌아가길 꿈꾼다. 윤 목사는 “카페에서 동네 사람들과 부대끼던 2년 반이 참 좋았다”며 “교회가 더 자라더라도 언젠가 다시 동네에 작은 카페를 열어 커피를 내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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