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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항쟁기(일제강.기) 부천 소사(素砂) 지역에는 조선으로 넘어와 정착한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사공립심상소학교가 1913년 6월 설립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겪은지 3년 후에 만들어졌으므로 매우 빨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일본인들이 소사 지역에 정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사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학교조합이 만들어져야하는데, 소사학교조합은 1913년 5월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 관할지역은 부평군 석천면, 옥산면, 수탄면이었다.
▲ 1913년 5월17일 조선총독부관보?고시150호에 의해 소사학교조합은 1913년 5월 15일 설립인가 되었으며 5월 17일 관보를 통해 공시되었다.
ⓒ 국사편찬위(한국데이타베이스)
오늘로 보면 부천시 상동, 중동, 송내동, 심곡동, 원미동, 소사동, 역곡동, 범박동, 괴안동을 비롯해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항동에 해당된다. 부천 소사지역은 서울과 인천 중간에 위치하고 경인철도가 있어 많은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1903년 원예업자들이 들어와 과수원을 대대적으로 조성하였으며,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소 등 통치기관이 만들어지며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들은 부천지역의 토지를 급속히 。유해나갔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침략자 일본은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자국민들을 위해 좋은 여건을 조성하고 교육을 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을 당연히 했지만 그렇다고 자국민들에게 많은 투자와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바로 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인 자녀들이 다닌 소학교의 문제를 통해 시대상을 알아보고자한다.
교장 배척운동 원인
교장 배척운동은 1930년 4월에 일어났다. 직접적인 원인은 그 당시 교장이었던 장전풍장(長田豊藏)과 학생, 학부형, 학교조합과의 소통 부재였다. 그해 3월 말 훈도(교사)였던 繰牛之助(조우지조)가 안성으로 전근을 가게되었는데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繰牛之助(조우지조) 훈도가 계속 심상소학교에 근무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교장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전근을 가도록 허락하였고 조우지조는 학교를 떠났다. 이로인해 반목과 질시가 계속되었으며, 학부형들과 학교조합의원들은 부천군 당국에 진정을 하였다. 특히 12명의 학교조합의원들은 사퇴를 결의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쟁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부천군수였던 친일파 김태석은 교장 배척운동을 묵살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이 당시는 농촌사회였으므로 농번기로 문제가 잠시 잠잠해졌다가 농사가 끝난 그 해 9월 다시 표면화 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교장의 사퇴로 마무리되었다. 1931년 새로운 교장인 濱田淸堯(빈전청요)가 부임하였으며, 장전풍장은 그 이후 조선에서의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 1930년 4월 17일 조선신문의에 실린 <소사소학교 교장 배척운동> 기사?학생, 학부형, 학조의원들은 현 교장인 장전풍장의 배척운동을 진행하였다. 원인은 직원간 그리고 학부형간 소통 부족인데, 직접적인 원인은 3월말 안성으로 전근간 조우지조(繰牛之助) 훈도문제였다. 학조의원 12명은 사퇴를 결의하였으며, 부천군청에 진정을 낼 정도였다.
ⓒ 국립중앙도서관(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훈도 한명으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까? 그것도 일본인들간의 문제인데, 그 이면에는 소사심상소학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소사심상소학교의 문제
첫번째, 훈도의 부족과 교육의 질 저하
훈도의 수도 매우 부족했다. 소사심상소학교는 1914년부터 1922년까지 1명의 훈도가 교육을 담당했으며, 1923부터 1925년까지는 2명이 담당했다. 1926년이 되서야 3명이 담당했으며, 이 인원은 1939년까지 이어졌다. 훈도가 적으므로 훈도에 따라 교육이 많이 달라짐을 알 수 있으며 그로인해 교장 배척운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25년 8월 22일 경성일보에 의하면 '소사심상소학교에서는 한 명의 교원이 네 학년에 걸친 아동들을 담당했다'고 보도하고 있으니 그 당시 소사 지역에서는 학생 수에 비해 학급과 교원이 부족했고, 그 결과 교육의 질이 많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고등교육기관의 부재
그 당시 부천 소사에는 초등교육기관만 있었지 고등교육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사역(현 부천역) 남부에는 소사심상소학교를 비롯해 조선인 자녀들을 위한 소사공립보통학교(1924년 설립)가 존재했다. 하지만 초등기관을 졸업한 사람들은 서울 또는 인천으로 진학을 해야했으며, 조금 이른 사람들은 학기 중 전학을 가야만했다. 2중, 3중의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소사심상소학교의 교장 배척운동을 통해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 자녀들이 이 정도의 고충을 겪고 있었는데 조선인 자녀들은 오죽했을까?
조선인 자녀들이 다닌 소사공립보통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닌 소사심상소학교에 비해 11년이나 늦게 만들어졌으며 또한 입학학고자하는 인원에 비해 수용할 수 있는 교실이 적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교실과 학급 증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소사 지역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그늘과 비애를 교육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가야만했다. 2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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