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에는 최근 몇 년간 '슈퍼사이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노후 전력망 교체와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가 새로운 전력 수요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기 HD현대일렉트릭 대표이사 사장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수요가 늘었다 줄어드는 국면이 아니라 전력 인프라 시장의 규모 자체가 한 단계 커지는, 이른바 '스텝업(Step-up)'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이 같은 시장 판단은 HD현대일렉트릭의 향후 경영전략에도 반영되고 있다. 물량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방식의 외형 확대보다는 수익성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선별하는 원칙을 유지하는 한편 기술력과 품질, 납기, 생산역량, 글로벌 사업 기반을 동시에 강화해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올해 들어 수주가 늘면서 연초 제시했던 수주 가이던스도 22.8% 상향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현재 확보한 수주잔고를 기반으로 내년에도 견조한 성장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기술·현장형 CEO의 '선별 수주' 전략
이 같은 전략의 중심에는 30년 넘게 전력기기 사업 한길을 걸어온 김영기 사장이 있다.
1966년생인 김 사장은 경희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미국 텍사스A&M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93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이후 현대중공업 중국연구소 법인장과 전력기기·회전기기 연구 담당임원, 고압차단기 담당임원 등을 거쳤다. HD현대일렉트릭 출범 후에는 고압차단기 부문장, 전력기기부문장 겸 연구개발(R&D)부문장을 맡으며 연구개발과 제품 사업을 두루 경험했다.
특히 2020년부터 전력사업본부장을 맡은 뒤 전무와 부사장, 사장으로 승진하며 회사의 핵심 전력기기 사업을 장기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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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대표이사에 선임되기 전부터 사실상 최근 HD현대일렉트릭 성장 과정의 한복판에 있었던 셈이다.
외부에서 영입된 전략·재무형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라 연구개발과 제품, 해외 사업, 사업총괄을 거쳐 최고경영자에 오른 '현장형 엔지니어 CEO'라는 .이 김 사장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김 사장이 전력사업본부를 이끌던 시기부터 HD현대일렉트릭이 지켜온 원칙 중?하나는 '선별 수주'다. 전력기기 시장의 업황이 좋아졌다고 해서 수주 물량을 무작정 늘리는 대신 수익성이 담보되는 고부가가치 프로젝트를 골라 확보하는 전략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북미와 중동 등 핵심 시장에서 시장 호황이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주요 유틸리티와 전력청을 상대로 장기 고객 관계를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익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선별적으로 수주해왔다. 과거 확보한 우량 수주 물량이 최근 실적에 본격 반영되면서 외형 성장과 수익성 개선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전력기기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 같은 전략은 더욱 중요하다. 대형 변압기나 초고압 차단기는 주문을 받은 뒤 생산해 납품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크게 확대하기도 어렵다. 지금 많이 받는 수주가 수년 뒤 실적과 수익성을 좌우하는 만큼 단순 수주액보다는 프로젝트의 질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HD현대일렉트릭이 현재의 시장을 '스텝업'으로 판단하면서도 수익성 중심의 선별 수주 원칙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하는 배경이다.
지역별 전략도 차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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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에서는 현지 생산법인을 기반으로 기존 유틸리티 고객뿐 아니라 데이터센터 고객까지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중동에서는 주요 전력청과 장기간 쌓아온 파트너십을 활용해 수익성 높은 프로젝트를 선별적으로 수주한다. 환경규제가 빠르게 강화되고 있는 유럽에서는 가격 경쟁보다 기술력을 앞세운다.
육불화황(SF?)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가스절연개폐장치(GIS), 친환경 변압기, 해상풍력용 특수변압기 등 진입장벽이 높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중심으로 시장을 넓힌다는 전략이다. 현재 145kV(킬로볼트)급 SF?-Free GIS의 유럽 공급 실적을 확대하는 동시에 420kV급 제품도 국내 최초로 개발하며 친환경 초고압 송전망 시장에 대응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DC·HVDC로 확장…'스텝업' 대응 속도
김 사장이 바라보는 다음 성장 무대는 AI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전력을 끌어오는 초고압 설비부터 내부로 전력을 공급하는 배전기기, 각종 회전기기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기존 송전 중심의 전력기기 업체가 사업 범위를 배전 영역으로 넓힐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다.
실제 HD현대일렉트릭의 성장세는 기존 초고압 전력기기를 넘어 배전기기와 회전기기로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북미 데이터센터를 대상으로 전력기기와 배전기기를 함께 공급하는 장기 계약도 확보했다.
앞으로는 데이터센터에 개별 제품을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초고압·배전·회전기기를 묶은 종합 전력 인프라를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AI 연산량 증가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밀도가 높아지는 상황에 대응해 직류(DC) 배전 시스템과 차세대 전력변환 기술도 준비하고 있다.
김 사장이 시장을 '일시적 호황'이 아닌 '스텝업'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은 생산능력 투자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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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청주 배전캠퍼스를 통해 배전기기 생산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울산공장을 증설해 초고압 전력기기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앨라배마 생산법인 역시 기존 초고압변압기 생산 실적을 기반으로 제2공장을 완공해 북미 현지 생산능력을 더 늘릴 계획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력기기 공급 부족과 납기 경쟁이 이어지는 만큼 생산 기반 자체가 향후 수주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생산능력 확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 사장이 강조하는 또 다른 축은 기술과 품질이다. 김 사장은 2019년 울산상공대상을 받은 데 이어 2022년 무역의 날 은탑산업훈장을 수훈, 올해에는 글로벌품질경영인대상을 받았다. 연구개발 부문에서 출발해 사업본부장을 거쳐 최고경영자에 이른 이력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앞으로 확보해야 할 성장 동력도 기존 변압기 사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HD현대일렉트릭은 AI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와 함께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계통 안정화, DC 전력기술, 고압직류송전(HVDC), 산업 전기화,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을 핵심 성장 분야로 꼽고 있다.
장거리·대용량 전력 송전 수요에는 HVDC 기술로 대응하고, 친환경 선박과 산업 전동화 확대에는 고효율 전동기·발전기 사업을 확대한다.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 확대에 맞춰 ESS 사업도 키운다는 구상이다.
30년 넘게 전력기기 산업을 경험해온 김 사장이?현재 시장을 '사이클'이 아니라 '스텝업'으로 규정한 만큼, 커진 시장에서도 지금의 수익성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체질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초고압 변압기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HD현대일렉트릭을 송전과 배전, 데이터센터, DC·HVDC, ESS까지 아우르는 전력 인프라 기업으로 얼마나 확장할 수 있을지가 김 사장의 다음 승부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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