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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보리스 존슨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니캅·부르카를 착용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해 큰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반무슬림 증오범죄 감시 단체인 ‘텔 마마’(Tell Mama)는 그 이후 무슬림 여성에 대한 학대가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기사가 보도되기 전 주엔 5명의 학대/폭력 신고가 있었지만, 보도 이후엔 히잡을 착용한 여성 14명과 니캅을 착용한 여성 7명이 학대를 신고했다는 것. 텔 마마는 “여성들이 대체로 신고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보다 낮은 수치일 것”이라며, “정치적 발언에는 영향력이 있다”고 보리스 존슨을 강력히 비판했다.
권력을 가진 자의 혐오표현은 사회적 해악이 커
고위공직자의 혐오표현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는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지난 3월 30일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공적 발언과 사회적 영향 분석」 연구용역 최종결과를 보고했다. 그에 따르면 이상민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 “경찰 미리 배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었다”며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을 한 후, 유족에 대한 혐오 댓글은 전날 237건에서 1,980건 증가한 2,218건으로 늘었다. 권성동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이용한다”는 발언과, 김미나 전 창원시의원의 “나라 구하다 죽었냐”라는 발언 이후에도 유족 혐오, 피해자 혐오 댓글은 더 늘어났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실시한 ‘혐오차별 국민인식조사’와 2021년 실시한 ‘온라인 혐오표현 인식조사’에서도, 시민들은 “국회의원 등 정치인이 혐오를 조장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항목에 2019년 58.8%, 2021년 46.6%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정치인 등 유명인이 혐오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혐오표현이 사회적으로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는 응답은 2019년 49.4%, 2021년 76.3%로 크게 증가했다.
이렇듯 고위공직자와 정치인의 혐오표현은 파급력이 커서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선동할 수 있지만,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에 시민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사회적 해악성이 높은 고위공직자의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책을 마련하기 위해 2026년 3월,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퇴진 공동행동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을 중심으로 법개정안을 제안했다. 지난 9일 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의실에서 열린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규율을 위한 법개정〉 토론회에서, 법개정의 필요성과 내용이 공유되었다.
왜 고위공직자, 정치인의 말은 더 위험한가
고위공직자의 혐오표현이 위험하다고 보는 이유는 먼저, 이들의 말이 단지 말로 끝나지 않고 확산된다는 。이다. 박진솔 민주언론시민연합 미디어모니터링팀장은 “고위공직자의 혐오표현은 언론에 보도되고, 포털에 노출되고,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로 옮겨지고, 댓글과 밈으로 재생산된다. 그들의 말은 곧 뉴스가 되고, 뉴스가 된 혐오는 다시 사회의 언어가 된다”고 짚었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선임간사는 “사회에서 권력과 힘을 가진 유력 인사의 혐오표현은 대중에게 ‘이러한 표현이나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허가’를 제공하며 혐오 담론을 강화한다”고 비판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혐오표현이 우리 사회의 차별 감수성을 무력화한다는 지적이다.
오인영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플랫폼 팀장도 “오늘날 고위공직자의 발언이 가진 힘은 공적 지위, 미디어의 주목,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 구조가 결합된 일종의 ‘발언 권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이러한 구조 속에서 혐오표현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될 경우,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하나의 정당한 의견처럼 받아들여질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 2026년 9월 9일 국회의원회관 제3간담회의실 203호에서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규율을 위한 법개정〉 토론회가 열렸다. (공동 주최: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이재정, 진보당 손솔,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퇴진 공동행동단) ⓒ일다
혐오표현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까? ‘그렇지 않다’
혐오표현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에 대해선, 토론자들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혐오표현을 규율하는 것은 모든 시민(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와 민주적 공론장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오인영 팀장은 “고위공직자나 다수자의 혐오표현은 소수자 집단에게 공포감과 위축감을 심어주어 공적 발언을 주저하게 만들고, 공론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통째로 소거시킨다”고 말했다. 때문에 혐오표현 규제는 표현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의 혐오 발언 때문에 시민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민주적 공론장의 참여 조건을 지켜주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국제인권기준도 혐오표현 규제는 표현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조혜인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2019년 UN 혐오표현 전략 및 행동계획에 따르면, 혐오표현에 대응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며, 혐오표현이 차별·적의·폭력의 선동이나 증오범죄로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 명시되어 있다”고 밝혔다.
오히려 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국가들은 ‘표현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왔다. 조혜인 변호사는 “국제인권기준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혐오표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해악성 수준에 따른 다층적 접근을 권고한다”고 했다. 가장 해악성이 높은 차별·적의·폭력의 선동은 국제형사법이나 일반 형사법에 따라 엄격히 금지하고, 중간 수준의 표현에는 행정적·사회적 규제를 적용하며, 형사처벌이 적절하지 않은 낮은 수준의 혐오표현에는 공공정책과 교육, 대항 표현 등으로 대응하는 방식이다.
▲ 조혜인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가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규율을 위한 법개정안의 내용과 취지”를 발표하고 있다. ⓒ일다
또한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2012년 채택한 「라바트 행동계획」은 표현의 해악성을 평가할 때 사회적 맥락, 발화자의 지위와 영향력, 의도, 내용과 형식, 파급력, 실질적 해악 발생 가능성 등 6개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한다.
조 변호사는 “이 기준에 따르면 발화자의 지위, 자본, 미디어 파급력이 압도적인 정치인 및 고위공직자의 발언은 동일한 내용이라도 일반 개인의 발언보다 해악성이 훨씬 크게 평가되어, 더 강하게 규율되어야 한다는 .이 드러난다”고 짚었다.
혐오표현의 정의는? 법 개정은 어떻게?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규율을 위한 법개정안은 국제인권기준에 따라 혐오표현을 법률상 정의하고, 각 영역별 법률을 통해 이를 규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먼저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정의)에 혐오표현에 관한 통합적·포괄적 정의 조항을 신설한다. 더불어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책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국회법,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 공직선거법 등 관련법을 개정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혐오표현’은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조혜인 변호사는 혐오표현의 세 가지 요건을 설명했다. 첫째는 성별, 장애, 성적지향, 인종, 출신지역 등 기존 국가인권위원회법에 규정된 차별금지 사유와 관련된 표현이다. 둘째, 특정 사람 또는 집단에 대해 모욕, 비하, 멸시, 위협을 표시하거나, 차별과 폭력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다. 셋째, 해당 언동이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조장,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경우이다.
▲ 조혜인 변호사가 발표한 “고위공직자 혐오표현 규율을 위한 법개정안의 내용과 취지” 중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 ‘혐오표현의 정의’ 부분. ⓒ일다
따라서 사회적 강자나 다수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 표출, 정권이나 공직자에 대한 거친 정치적 비판과 풍자는 개정안에서 말하는 혐오표현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존의 구조적 차별을 강화하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에는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 등 「공직자윤리법」상 고위공직자가 직위나 업무와 관련해 혐오표현을 한 경우 국가인권위원회가 직접 조사하고 시정권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 국회법 개정안에서는 국회의원의 혐오표현을 징계 사유로 신설해, 국회 의결을 통해 자율적으로 징계할 수 있도록 했다. 공직선거법 제7조에는 정당과 후보자의 공정경쟁 의무에 혐오표현 금지를 명시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과정에서 혐오표현을 예방하고 계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국회의 의지, 언론의 책무, 그리고 차별금지법이 필요
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실제 효력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과제로 제기되었다. 토론자들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동료 의원 봐주기’나 정쟁으로 인해 장기간 파행·표류해 온 현실”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국회법 개정이 실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징계안건 심사 시한을 법률에 엄격히 명시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과 국회의 강력한 입법 의지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의 역할도 재차 강조되었다. 박진솔 팀장은 “고위공직자의 혐오발언을 단순히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인용하거나 ‘양당 정치공방’으로 평면적 중계보도를 하는 태도는 혐오를 증폭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이어 “언론은 혐오의 맥락을 검증하고,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혐오표현 규제에 있어 차별금지법과 같은 기본법의 유무는 중대한 요인이 된다”고 짚었다. “기본법이 부재하다는 것은 차별은 무엇이고 혐오란 무엇인지 그 정책적 기준.이 없다는 의미라는 .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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