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독갑이댁 수레노래’ ⓒ국립민속국악원
지난 10여 년 사이 창극은 젊은 관객층의 폭발적인 유입을 이끌어내며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국내 공연계의 대세 장르로 부상했다. 또한 프랑스 파리 샤틀레 극장, 미국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BAM),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와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 등에 초청돼 현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는 등 해외에서도 예술적 경쟁력을 입증해 왔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면 이른바 ‘창극 르네상스’는 국립창극단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립극장이 지난해 출범시킨 ‘창극중심 세계음악극축제’는 바로 이러한 전성기를 극장 바깥의 공연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회째인 올해는 9월 3~26일 약 4주간 국립극장 제작 3편(국립창극단 등)과 국내 초청작 4편, 해외 초청작 2편 등 총 9편을 선보였다. 그러나 출범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축제의 골격을 세워야 할 지금, 축제의 지향.과 정체성을 더욱 냉정하게 。검해야 한다.
이번 축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독갑이댁 수레노래’와 전남광주통합특별시립창극단의? ‘회경루방회도’ 등 지역 창극단의 무대를 서울에서 선보였다는 。이다. 물론 첫 참여인 만큼 무대 연출이나 극적 완성도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립창극단의 화려함에 가려져 있던 남도 소리의 본령과 질박한 호흡을 지켜온 전라도 창극단이 수도권 관객과 직접 호흡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여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이는 예술의전당이 매년 주최하는 ‘교향악축제’의 성공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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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시작된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역시 초기에는 열악한 인프라와 지역 간 격차 속에 출발했으나, 지역 교향악단들이 서울 무대라는 건강한 긴장감 속에서 기량을 꾸준히 상향 평준화하며 한국 클래식 생태계 전반을 바꿔놓았다. 세종문화회관 역시 이를 본떠 2023년 ‘대한민국국악관현악축제’를 출범시키며 전국 국악관현악단의 균형 발전과 교류의 장을 마련한 바 있다. 지역 창극단 또한 이처럼 지속적인 교류와 큰 무대 경험이 축적된다면 예술적 완성도와 기량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립창극단의 ‘회경루방회도’ ⓒ전남광주통합특별시립창극단
하지만 서양 오케스트라나 국악관현악단과 달리, 국내 창극단의 풀(Pool)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좁다. 이런 현실에서 축제가 내건 ‘세계음악극’이라는 타이틀은 2회를 거치며 뚜렷한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축제는 지난해 중국의 월극과 일본의 노, 올해 중국 상하이경극원의 경극(‘지단 왕자의 복수’)과 태국 왕립무용단의 콘(‘콘: 라마끼엔의 이야기’)을 차례로 초청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완성도 높은 전통 기반 음악극의 풀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매년 새로운 해외 전통극을 발굴해 올리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섭외의 한계와 콘텐츠 고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아울러 이번 축제에 근현대 대중가요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백만사’가 초청작으로 포함된 것도 축제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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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창극의 저변을 넓히고자 지난해 ‘판소리 아지트 놀애박스’, 올해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처럼 민간 예술단체를 꾸준히 무대에 세우고 있다. 하지만, 활동 단체 수가 워낙 적고 규모 역시 영세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세계’라는 버거운 외투를 걸친 채 몇 안 되는 국·공립 및 민간 단체, 그리고 섭외가 제한적인 해외 전통극을 무리하게 돌려막는 구조로는 생태계 확장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태국 문화예술부 왕립무용단 ‘콘: 라마끼엔의 이야기’ ⓒ국립극장
결론적으로 무리하게 ‘세계음악극축제’를 표방하며 구색 맞추기식 해외 초청에 얽매일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축제명을 ‘창극 페스티벌’ 또는 ‘페스티벌 창극’으로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해외 전통 음악극은 반드시 매년 넣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창극과의 교류 맥락상 꼭 필요한 해에 유연하게 곁들이는 선택적 카드로 전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울러 창극을 해외에 소개할 때 관행처럼 써온 ‘코리안 트래디셔널 오페라’(Korean Traditional Opera)라는 서구 중심적 번역 틀에서도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축제의 공식 영문 명칭인 ‘월드 트래디셔널 오페라 페스티벌’(World Traditional Opera Festival) 역시 창극을 알리기에는 부적절하다. 일본의 ‘가부키’나 ‘노’처럼, 중국 역시 과거 쓰이던 ‘베이징 오페라’ 대신 고유명사인 ‘징쥐’(Jingju, 경극)로 전환하며 장르적 주체성을 확립했다. 어쩔 수 없이 ‘베이징 오페라’를 쓸 때도 ‘징쥐’를 병기한다. 창극 역시 ‘Changgeuk’이라는 고유명사를 축제의 얼굴로 당당히 내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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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컴퍼니의 ‘백만사’ ⓒ혜성컴퍼니
부족한 단체 수와 레퍼토리 빈곤을 뚫어낼 열쇠는 ‘창작 판소리’의 적극적 포섭에 있다. 그동안 공연계는 관행처럼 다인극 형태의 대형 무대만을 창극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창극의 기원 자체가 한 명의 소리꾼이 이끌던 판소리의 연희성을 근대 극장 무대에서 배역별로 입체화한 실험이었다. 더욱이 오늘날 젊은 소리꾼들의 창작 판소리는 북장단에만 기대던 옛 방식을 넘어 조명, 영상, 다채로운 악기 세션, 연출이 결합된 온전한 1인 음악극 형태를 띤다. 창작 판소리 역시 ‘1인 창극’으로서 축제의 정식 범주에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된다면 ‘1인 창극’이라는 실험실부터 민간의 중소형극, 국공립의 대형극까지 촘촘하게 엮어내며 국립창극단에 편중된 레퍼토리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나아가 작창가 프로젝트를 아우르는 제작·인큐베이팅 플랫폼으로 축제를 확장하는 것도 실질적인 대안이 된다.
창극의 세계화는 해외 전통극을 무리하게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유수 공연 관계자들에게 창극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매년 가을, 해외 유력 페스티벌 디렉터와 프로그래머들이 대거 방한하는 서울아트마켓(PAMS)이나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시즌에 맞춰 축제 일정을 조율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막대한 해외 홍보비 없이도 국립뿐 아니라 지역과 민간 창작자들의 실질적인 글로벌 진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앞으로 3회째를 맞는 축제는 ‘세계’라는 모호한 겉포장을 털어내고, ‘창극’이라는 선명한 깃발 아래 국립창극단과 지역 창극단, 젊은 소리꾼들의 1인 창극을 단단히 엮어내야 한다. 고유명사 ‘창극(Changgeuk)’의 본령으로 더 깊고 넓게 파고들 때 비로소 세계도 주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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